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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반란/ 조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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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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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얼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조은혜/ 인천 부개여고 3년

대학 면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물었을 때 ‘서태지’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H.O.T 멤버의 부상 소식에 수많은 십대 소녀들이 혼절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여전히 10대 팬 문화는 건재하지만, 누구도 예전만큼 컬트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다. 지금 10대를 타깃으로 하는 아이돌 산업이 전반적으로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는 분석은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얼짱 신드롬’은 단순히 외모지상주의가 빚어낸 한때의 유행으로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인기 있는 얼짱의 인터넷 팬카페의 회원 수는 수백, 수천 단위를 가볍게 넘어가고, 팬들은 얼짱의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고, 얼짱은 인기에 힘입어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 공식적으로 데뷔하기도 한다. 10대들은 왜 이렇게 얼짱에 열광하는가.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얼짱의 열기와 아이돌 산업 침체의 이유를 연관지어 생각해보자. 알려져 있듯이,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는 철저히 연예기획사가 만들어낸, 말 그대로 ‘기획의 산물’이다. 세상에 선보이기 전부터 그들의 이미지는 정해져 있다. 심지어 기획사들은 미리 어떤 이미지가 10대에게 인기 있을지 생각해 이미지를 만들어두고 거기에 맞는 후보를 물색하기도 한다. 발탁된 후보들은 다년간의 힘든 훈련을 거쳐 세상에 선보이게 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는 별로 없다. 남이 작곡해준 노래를 부르고, 남이 만들어준 이미지에 맞추어 연기하는 그들에게서, 10대들이 공감을 발견하기란 점점 어려워진다.


이에 반해 얼짱은 조작이나 훈련을 거치지 않는다. 사실 만능 엔터테이너이길 요구받는 기존 연예인들과 달리 외모라는 비교적 단순한 평가기준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작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점은, 얼짱이란 철저히 ‘내가 만들어낸 스타’라는 점이다. 공개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한장을 보고 맨 처음 누군가가 ‘괜찮다’ ‘예쁘다’는 글을 올리고 그 글에 하나둘씩 동감을 표하는 덧글들이 달리면서 얼짱이 탄생한다. 이 단계에서 얼짱이란 단순한 숭배의 대상이 아닌 상호교류의 매개체에 가깝다. 이처럼 그들의 시작은 기존 연예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처음 얼짱을 발굴한 사람들이 ‘내가 스타를 발굴했다’는 일종의 뿌듯한 자부심마저 갖게 되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얼짱문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선한 충격이다. 일단, 기성문화와 10대문화의 관계역전이라는 점이 그렇다. 전통적으로 청소년은 문화의 주체라기보다는 전 세대가 형성한 문화를 학습을 통해 전수받아서 보존하는 존재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얼짱을 만들어낸 10대들은 이런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내었다. 요즘은 40~50대들도 얼짱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는 점을 들어 문화를 기성세대에게 전파시켰다고까지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겠지만, 적어도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준 셈이다.

관점을 확대해서 적용해보면, 이것은 대중문화 창작자들에 대한 향유자들의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굳이 독재시절의 스리에스(3S) 정책을 들지 않더라도 기존 대중문화가 소수에 의한 대중 조작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에는 그다지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얼짱 신드롬은 다르다. 탈산업사회의 입구에서, 향유자인 대중들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이용해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창작자에 해당하는 문화산업계는 이 자생적 경향을 뒤쫓느라 바쁘다. 이정도면 가히 ‘문화의 역류’라 할 만하다.

분명 얼짱 신드롬에는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 공감을 얻어내는 수단이 오로지 외모라는 사실은 아무리 변명해도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리고 스스로의 개성적 인격을 만들기보다 특정인의 우상화와 동일시해 정체성을 찾으려는 10대문화의 부정적 단면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면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얼짱을 ‘10대들의 철없는 행각’쯤으로 치부해버리려는 태도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또한 얼짱문화를 스타 등용문으로 좁히려는 상업적 태도도 지양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는 얼짱을 10대 나름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파악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청소년 문화의 이해와 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하려는 태도가 가장 절실하다. - 조은혜/ 인천 부개여고 3년


[ 칭찬과 아쉬움 ]

‘어른은 가라. 얼짱문화는 우리 것!’ 얼짱문화에 대한 찬반을 묻는 예컨대 논술에 이렇게 대답하는 청소년이 적지 않았다. 물론 얼짱문화가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엄숙주의 문화에 저항하는 청소년 하위문화의 반란이라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높았다. 오히려 얼짱문화가 청소년들이 꽃피운 새로운 문화양식이고, 자기PR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내용으로 글을 쓴 학생들의 논리가 더욱 구체적이었다.

인천 부개여고 조은혜 학생은 어른들의 복화술을 반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얼짱문화를 외모지상주의 폐해로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어른들의 ‘쉬운’ 비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다르게 보는 패기와 뒤집어 생각하는 사고력이 녹아 있다. 또한 하위문화의 생산자로서 청소년의 자긍심이 넘친다. 예컨대 “기성문화와 10대문화의 관계역전” “대중문화 창작자들에 대한 향유자들의 반란”과 같은 표현에는 그 문화의 동참자만이 찾을 수 있는 발견이 담겨 있다. 나아가 디지털 카메라라는 자기표현 수단과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킹이 불러온 “문화 역류”에 대한 통찰도 빛난다.

논리구조로 보면, 그의 글은 ‘팬덤 현상의 침체 → 연예기획사의 기획을 대체하는 청소년 문화의 자생성 → 대중문화 창작자들에 대한 향유자들의 반란 → 마침내 문화 역류 → 외모지상주의와 상업적 이용에 대한 경계’로 이어진다. 팬덤의 침체를 통해 얼짱문화의 등장을 설명한 첫머리는 새롭고 날카롭다. 그러나 본론 부분에서 얼짱문화에 대한 칭송이 길어진 나머지 전체적으로 분량 조정에 실패했다는 느낌이다. 탄탄한 서론과 본론에 비해 결론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얼짱문화에 대한 ‘칭송’을 줄이고, 얼짱문화의 부작용을 본론으로 끌어들이며, 결론을 얼짱문화의 명암을 종합하는 내용으로 강화해야 했다. 또한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청소년 하위문화가 결국에는 연예산업에 포섭되는 불행한 운명을 지녔다는 점을 충분히 지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가자의 ‘트집잡기’에도 불구하고 조은혜 학생의 글은 어른들의 엄숙주의에 ‘한방’을 먹이는 멋진 글이었다.

인천고 최진헌 학생도 얼짱문화를 기성세대의 엄숙주의에 도전하는 젊은 세대의 자기표현으로 평가했다. 심지어 얼짱문화를 자유로운 표현능력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등장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도 얼짱문화를 지나치게 긍정한 나머지 외모 차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을 찾기 힘들었다.

얼짱문화를 외모지상주의로 비판한 글 중에서는 수원 영덕고 고은미 학생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고은미 학생은 얼짱문화가 외모지상주의 문화를 한층 심화시키고 있으며, 언론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결론 부분에 “얼짱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능력이 짱인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와 같은 경구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얼짱문화의 진행과정에 대한 서술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얼짱문화에 대한 비판논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서울 정신여고 김지영 학생은 얼짱 신드롬을 명문대, 명품 브랜드 등 최고만을 선호하는 사회문화와 관련지어 설명했다. ‘가장 좋은 것’만을 우상시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주었지만, 논리 구성이 탄탄하지 못했다. 특히 글 첫머리의 얼짱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이나 출제된 문제의 문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사족이다. 할 말은 많고, 원고지는 좁다. 원고지를 아껴써야 좋은 논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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