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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마음밭에 감동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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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0 00:00 수정 : 2008-09-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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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 이오덕 선생과 작가 권정생이 마음을 나눈 편지들]

1972년 가을 47살의 아동문학가이자 교사 이오덕은 어느 기독교 잡지에 실린 동화 <강아지똥>의 순결함과 깊이에 감동받고 그 글을 쓴 권정생을 찾아갔다. 권정생은 경북 안동 근처 시골 교회의 종지기, 가난과 전신결핵의 고통 속에서 뼈를 깎아 글을 쓰는 35살의 무명작가였다. 두 사람은 첫눈에 마음이 통했다. 그때부터 깐깐한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권정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권정생이 한줄한줄 써내려간 <우리들의 하느님> <몽실언니> <한티재하늘> <슬픈 나막신> 등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들은 이오덕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오고 알려졌다. 둘의 우정은 지난 8월25일 이오덕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오덕 선생은 자신의 무덤가에 권정생의 시 <밭 한 뙈기>를 새긴 시비를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한길사 펴냄)는 두 사람이 20년 넘게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소박하고 간결한 편지글 사이에서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외로움과 서로에 대한 존경과 격려, 인생과 세상에 대한 생각들이 배어나오고, 글에 대한 고민과 문학계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이 편지들을 고르고 직접 제목을 붙여 출판을 부탁했다. 권정생의 동화와 소설뿐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권정생이 이오덕에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했을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글들은 일상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버린 마음들까지 헤집어놓는다.

“어머니께서 어린 나를 안고 불러주던 노래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 애기 뉘집 애기 쓰레기통 집 애기’ 이래서 끝내 쓰레기 인간이 되고 말았나 봅니다. 정말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주워다 놓은 쓰레기(고물)가 뒤란 처마 밑에 꽉꽉 쌓여 있었습니다. 퀴퀴한 냄새 나는 집안은 언제나 비어 있습니다. 동경 거리를 쓰는 청소부 아버지, 열두 살짜리 누나도 공장에 나갔다고 했습니다.” 1937년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9살 때 돌아온 고국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그의 작품에서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과 또렷한 역사의식으로 숨쉬고 있다.

홀로 외딴집에 누워 아픔을 달래는 작가는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제게 너무 마음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름에도 잘 지낼 것 같습니다. 까만 염소 두 마리를 사 먹이고 있는데 가끔 가다가 어찌나 재롱을 떠는지 참 웃깁니다.” “적어도 저의 동화에선, 어떤 조건에서도 인간은 구원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오덕 선생은 “선생님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지도 않고 지내온 것이 죄스럽습니다. 우편환으로 칠천원 부쳐드립니다. 우선 급한 대로 양식과 연탄 같은 것 확보하십시오. 신문값 같은 것은 차차 내도록 합시다”라고 자상한 맏형 같은 편지로 보살핀다.


그리고 이오덕의 죽음 앞에서 권정생은 이 책의 서문인 다음과 같은 글로 선생을 떠나보낸다. “전화가 끊기고 나서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을…. 순간 먼 산길로 선생님이 걸어가시는 뒷모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한쪽 손에 두툼하게 싼 책보자기를 들고 한쪽 어깨엔 느슨하게 끈 달린 가방을 메고, 선생님은 그렇게 산길 모퉁이를 걸어 사라지셨습니다. …아직 이승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선생님이 남기신 골치 아픈 책들을 알뜰히 살피며 눈물나는 세상 힘겹게 견디며 살 것입니다. 사이 좋다가도 토라지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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