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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누가 ‘인재’인가/ 유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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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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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고교 교육의 중심은 어디에]

유성민/ 대전 보문고 2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내용으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임을 말한다. 민주공화의 요지는, 누구나 평등하게 자신이 스스로를 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에 그것이 명시된 이상 우린 누구나 평등할 권리가 있다. 법을 지키는 것은 공화국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국 체제는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최근 고교교육 정상화에 관한 발언 중 하나가, 고교평준화의 축소와 폐지다. 비평준화 명문고의 부활, ‘엘리트 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에겐 우수한 소수의 학력 저하가 무엇보다 두려운 모양이다. ‘국가를 이끌 인재’들의 수준을 낮추는 교육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인재를 기르자는 취지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놓친 사실이 있다. 이른바 ‘교육정상화가 무엇일까?’라는 기본 정의. 그들은 학력 신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학력은 뭔가 그들은, 이른바 명문대인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일컫는 ‘스카이’(SKY)에 갈 수 있는 능력을 학력이란 말로 얼버무린다. 학력이란 지식 소양과 특정 분야에서의 능력을 합친 것을 말한다. 사실, 사회는 일반 교양과 특정 분야에서 필요한 능력을 갖춘 이들로 이뤄졌다. 하지만 ‘교육의 정상화’를 외치는 이들에게 학력은, 특기와 적성은 없고 ‘수치화된 데이터’만 있다. 숫자의 상하를 학력의 상하로 보고 ‘학력의 저하’를 한탄하는 것이다.


대학교 이전의 고등교육은 ‘지식 소양’을 기르는 과정이며, 성년이 되어 대학교를 다니면서 진정 사회에서 쓰는 ‘특정 능력’을 기른다. 즉, 학력은 고교의 문제만이 아닌 것이다. ‘반’은 대학의 문제인데, 우리 대학의 현실은 ‘인문학의 몰락’과 ‘이공계의 위기’가 아니던가? 이것의 책임을 모두 고교교육에 전가할 셈인가?

서울대를 가야 성공하고, 서울에 가야 뭐라도 한다는 뿌리박힌 인식이 온 국민을 사로잡고 있는 판에, 오늘도 나를 비롯한 서울공화국의 학생들은 숫자를 위해 수능 모의고사 외국어영역 시험을 보았다. 독서와 체험을 통한 ‘소양 습득’이 물 건너가고, 고교교육이 ‘입시 위주의 파행’으로 변한 것이 평준화 탓인가? 바로 ‘명문’을 숭상하고, ‘서울’만을 좇는 엘리트 교육 탓은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서울에 가려는 소수 덕에 인문계 고교 대부분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교육이 아닌 ‘전쟁’. 그리고 승자는 엘리트가 되고, 패자는 서민이 된다. 교육은 교육이어야 한다. ‘전쟁’에서 나오는 인재는, 상처받은 인재일 뿐이다. 우린 ‘제대로 된 인재’를 키워야 하고, 그러자면 ‘종전’을 선언해야 한다. 엘리트 교육의 종전을 선언하면, 교육의 정상화는 ‘제대로 된 인재’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바뀐다. ‘국가를 이끄는 인재’는, ‘국가를 이끄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라의 구성원 전체, 소수가 아닌 이름 없는 서민이요, 민중이다. 그들이 역사를 움직였고, 나라를 이끌어왔다. 20 대 80이니 5%의 시대니 하지만, 그들 소수에게 80과 95가 없다면 그들의 존재가치도 없다. ‘국가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다면, 모두의 의식과 교양을 높이기 위해 전체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 진정한 ‘인재양성의 길’이 아닐까?

서울대 학생이 인재고, 서울로 가야 엘리트라는 이 뿌리 깊은 서울공화국의 세뇌. 우린 서울공화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법 아래에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평등할 권리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준화 폐지 논쟁을 계기로 유럽 등지의 ‘대학 평준화’를 도입해 서울공화국이 아닌, 평등한 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명문고·명문대를 가기 위한 이전투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 평등의 확립이다. 변호사는 변론이 뛰어날 뿐이고, 의사는 의술이 높을 뿐이다. 각자는 각자의 일에 맞는 능력을 가질 뿐, 귀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99%에게 가르쳐야 ‘대한민국 1%’가 99%를 좌지우지 못한다. 1%를 이끄는 건, 99%의 교육으로 다져진 높은 의식과 의지이지 1%의 능력은 아니다. 평준화 유지를 통한 공교육 정상화만이 헌법 제1조를 파괴하는 헌정파괴를 멈출 수 있다.

유성민/ 대전 보문고 2년

[ 칭찬과 아쉬움 ]

백가쟁명, 백화제방. ‘고교평준화 논쟁을 중심으로 고교 교육의 중심을 엘리트 교육에 두느냐, 공교육에 두느냐’를 묻는 예컨대 논술에 학생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주장과 대안을 제시했다. 지금껏 예컨대 논술 중 가장 ‘뜨거운’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비평준화 지역의 중학생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평준화의 부작용을 호소했고,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생 역시 자신의 학교생활에 비추어 평준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체적으로는 교육 불평등을 우려하며 공교육 강화를 주장하는 입장과 평준화 폐지를 통한 엘리트 교육의 확산을 주장하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학생들은 한결같이 사교육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지만, 대안은 확연히 나뉘었다. 어떤 학생들은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나 자립형 사립고 같은 엘리트 교육을 강화하면 사교육비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학생들은 평준화 폐지가 중학교 때부터 사교육 열풍을 몰고 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어느 쪽이든 사교육이 판을 치는 가운데, 공교육에 걸었던 한 가닥 희망마저 접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일종의 ‘교육 허무주의’가 느껴져 씁쓸했다.

또 학생들의 생활과 밀접한 주제여서 거리두기가 어려운 듯했다. 목소리는 높으나 차분한 논리가 부족한 글이 많았다. 하나씩의 결함이 눈에 띄는 글들을 놓고 고심 끝에 지난주에 이어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을 뽑았다. 예산고 이찬우 학생, 울산 제일고 황산백 학생의 글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다. 유성민 학생의 논리가 가장 명징한 점을 높이 샀다.

유성민 학생의 글에는 엘리트 교육에 대한 근본 비판이 들어 있다. 헌법 제1조를 인용하며 공교육 강화의 정당성을 강조한 글의 서두부터 인상적이다. 평준화 폐지론자들이 흔히 쓰는 ‘교육 정상화, 학력 저하’라는 말을 뒤집어 공교육 강화 논리를 이끌어낸 부분도 휼륭하다. 그러나 그 뒷부분은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현 교육체제에 대한 비판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평준화 폐지가 불러올 현실적인 부작용에 대한 비판은 빠져 있어 아쉬웠다. 또 하나 덧붙이면, 서술어가 생략된 문장이 많아 글이 가볍게 보일 우려가 있다. 서술어 생략이 문장에 긴장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이를 남발하면 글의 진지함을 해치기 십상이다.

울산 제일고 황산백 학생은 사교육비 부담이 가계의 허리를 휘게 하는 현실에서 한달 30만원 정도의 학비가 드는 자립형 사립고를 통해 다른 사교육비 지출을 막을 수 있다면 오히려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라며 평준화 폐지를 옹호했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논리가 빛나는 글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공교육의 위기를 강조했을 뿐, 그 위기가 공교육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지 시행과정에서 파생된 것인지를 논증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

예산고 이찬우 학생은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보여주었다. “평준화와 비평준화의 논쟁은 ‘어떤 방식이 서울대에 더 많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다”와 같은 날카로운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글의 논지가 문제의 틀에서 너무 벗어나 버렸다. 엘리트 교육이냐 공교육이냐에 대한 논술은 뒷전인 채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매몰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문장과 표현을 써도 동문서답이면 좋은 논술글이 되기 어렵다. 항상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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