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는 남자’ 영화감독 김지운, 그의 상상력과 감성의 원천을 묻다
영화보기는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개인 취향이라는 걸 전제하고 얘기한다면 난 그가 만든 <반칙왕>이 한국의 최고의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한다. 슬프지 않은 건 웃기지 않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내게 ‘반칙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슬픈 영화였기 때문이다.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일상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의 데뷔 영화 <조용한 가족>도 그랬지만 <반칙왕>은 우리에게 일상과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 괴물인지를 담담하고도 자극적으로 그려냈고, 보는 내내 슬픔과 웃음은 언제나 함께 온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나서는 단 한번도 출퇴근을 한 적이 없으면서도 샐러리맨들의 애환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만들어내고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상상력을 가진 감독의 머릿속이 늘 궁금했드랬다.
특별한 유년시절과 10년 백수의 내공
현실에서의 그는 앞에 있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과묵하고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상대와 눈이 마주치거나 생각이 의기투합되는 것을 못 견디게 쑥스러워하는 성격 때문에 실내에서도 항상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를 즐겨 쓴다는 그가 인터뷰할 때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한데 의외로 그동안 몇번 인사만 하며 스쳤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멀쩡한’ 상태로 약속 장소에 나온 그를 보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선글라스도 쓰지 않은 채!).
그런 상상력과 감성들의 원천은 어디인지 궁금했다. 조금은 특별한 유년시절과 대학 졸업 뒤 10년간 쌓아온 백수의 내공이 자신의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것 같단다. 그는 세살 때부터 그림과 만화를 그렸는데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그 몰입의 정도가 심했다는 거다. 로맨티스트 아버지 덕에 가세는 기울어 이사를 자주 가게 됐고 덕분에 친구가 없었던 꼬마 김지운은 그때부터 극장을 찾기 시작한다. 오로지 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를 땡땡이 치기 시작한 그의 나이는 불과 아홉살이었고, 그때 그는 이미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어마어마한 진실을 영화로부터 배운다. 고삐리 시절은 어땠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로젤>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지숙은 그의 아홉살 위 누나다. 고딩 시절, 누나의 영향이었는지 대학로 룸펜 형님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그때 그에게 인생과 예술에 대한 ‘구라’를 풀어준 형들이 삐딱한 세상보기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극단 ‘76’ 단원들이었다니 그 당시 그의 ‘액션’과 영혼은 ‘안 봐도 비디오’다. 대학 졸업 뒤 누나를 따라다니며 잠시 연극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사 한두 마디이긴 하지만 ‘빵구’난 배우 대신 무대에 몇번 서봤던 기억이 영화 현장에서 배우를 배려하는 감독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현장에서 절대 큰 소리 내지 않고 아무리 상황이 꼬여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감독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배우들은 현장에서 언제나 극도로 예민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연극배우는 그나마 관객이라는 기댈 언덕이 있지만 영화배우는 기댈 언덕도 없이 외롭게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를 편하게 해주는 것도 감독의 역할 중 하나라고 믿는단다. 그리고 영화작업의 모든 ‘답’은 다 현장에 있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컨디션을 살피게 되며 심지어는 여배우들과 여자 스태프들의 생리 유무까지 신경이 쓰인다고 하니 그 배려의 섬세함이 놀라울 뿐이다. 삭발식 할 때도 집에서 머리 깎은 남자 예상한 것보다 말을 너무나 술술 잘해서 예전엔 당신이 사회 부적응자인 줄 알았노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고백했더니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다. 남들의 시선을 받는 걸 너무 못 견뎌서 스크린쿼터 삭발식을 할 때도 집에서 혼자 머리를 깎은 뒤 참가했고 현장에서 배우들과 신나게 작품 얘기를 하다가도 방송사 카메라가 오면 자기도 모르게 입이 쩍 달라붙는다고 한다(아니 이런 사람이 아무리 잠깐이었다지만 무대엔 어찌 섰드랬을꼬). 술을 아예 못 먹는 것도 아닌데 술자릴 가지 않는 것도 취기에 휩싸여 다같이 노래 부르고 취중에나 할 수 있는 ‘닭살 멘트’를 날리는 걸 못 견뎌하기 때문이라니 월드컵 4강 때 우리나라에서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을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시상식장에 갈 때도 언제나 빨간 카펫 대신 뒷문으로 몰래 들어갔으며 마초문화가 너무 싫어 군대에서조차 고참이 주는 술을 한번도 받질 않아서 아예 ‘열외’ 취급을 받았다는 그에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고민을 하는지, 만약 시위 같은 것에 동참할 기회가 있으면 하겠는지를 물었다. 그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대답 대신 해줬다. 큰형님이 천주교 교목으로 계시면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이신데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투쟁을 할 때 오셔서 ‘지원사격’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데 정작 영화인인 자신은 뜻을 같이해 현장까진 갔지만 ‘앞’에 나가는 게 너무 쪽팔려서 바로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걸 보고 동료 영화인들이 놀렸다는 거다.
요즘 제일 민감한 사항인 파병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당연히 전투병 파병은 절대 안 되며 정치를 하든 예술을 하든 절대로 변하지 않는 ‘기준’ 같은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살면서 제일 화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자신은 ‘작은 것’에 화가 많이 난다고 했다. 관공서나 병원, 식당 같은 곳에서 당연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불친절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거다. 상대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고도 했는데 그거 좋아할 사람은 아마 지구상에 없을 거다. 식당 아줌마의 불친절은 ‘작은 일’이고 파병 결정 같은 것은 ‘큰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은 침략전쟁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국가의 기본 헌법을 지키자는 아주 작으면서도 당연한 요구이며 남의 생명을 담보로 이루는 국가의 이익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남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 본능의 역지사지일 뿐인 것이다.
지성인과 ‘한심한 지식인’의 차이
그는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니까 지식인만 있고 지성인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잘라 말했다. 지식인은 회의와 반성 없이 학습한 언어체계만 되풀이하는 사람이고 지성인은 회의를 통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며 항상 반성을 하는 사람인 게 그 차이라는 얘기다.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그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되새김질해봤다. 김지운 감독의 말대로라면 우리 사회에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지성인은 찾아볼 수 없고 모조리 그놈의 한심한 지식인들투성이다. 도무지 반성이라는 걸 할 줄 모르니 말이다. 김지운 감독은 얼마나 많은 반성을 하며 살까 궁금해할 필요는 없는 거 같다. 나부터 반성해볼 일이다.
글 오지혜(영화배우)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그런 상상력과 감성들의 원천은 어디인지 궁금했다. 조금은 특별한 유년시절과 대학 졸업 뒤 10년간 쌓아온 백수의 내공이 자신의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것 같단다. 그는 세살 때부터 그림과 만화를 그렸는데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그 몰입의 정도가 심했다는 거다. 로맨티스트 아버지 덕에 가세는 기울어 이사를 자주 가게 됐고 덕분에 친구가 없었던 꼬마 김지운은 그때부터 극장을 찾기 시작한다. 오로지 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를 땡땡이 치기 시작한 그의 나이는 불과 아홉살이었고, 그때 그는 이미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어마어마한 진실을 영화로부터 배운다. 고삐리 시절은 어땠을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로젤>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지숙은 그의 아홉살 위 누나다. 고딩 시절, 누나의 영향이었는지 대학로 룸펜 형님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그때 그에게 인생과 예술에 대한 ‘구라’를 풀어준 형들이 삐딱한 세상보기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극단 ‘76’ 단원들이었다니 그 당시 그의 ‘액션’과 영혼은 ‘안 봐도 비디오’다. 대학 졸업 뒤 누나를 따라다니며 잠시 연극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사 한두 마디이긴 하지만 ‘빵구’난 배우 대신 무대에 몇번 서봤던 기억이 영화 현장에서 배우를 배려하는 감독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현장에서 절대 큰 소리 내지 않고 아무리 상황이 꼬여도 짜증 한번 내지 않는 감독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배우들은 현장에서 언제나 극도로 예민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연극배우는 그나마 관객이라는 기댈 언덕이 있지만 영화배우는 기댈 언덕도 없이 외롭게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를 편하게 해주는 것도 감독의 역할 중 하나라고 믿는단다. 그리고 영화작업의 모든 ‘답’은 다 현장에 있기 때문에 자신은 항상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컨디션을 살피게 되며 심지어는 여배우들과 여자 스태프들의 생리 유무까지 신경이 쓰인다고 하니 그 배려의 섬세함이 놀라울 뿐이다. 삭발식 할 때도 집에서 머리 깎은 남자 예상한 것보다 말을 너무나 술술 잘해서 예전엔 당신이 사회 부적응자인 줄 알았노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고백했더니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다. 남들의 시선을 받는 걸 너무 못 견뎌서 스크린쿼터 삭발식을 할 때도 집에서 혼자 머리를 깎은 뒤 참가했고 현장에서 배우들과 신나게 작품 얘기를 하다가도 방송사 카메라가 오면 자기도 모르게 입이 쩍 달라붙는다고 한다(아니 이런 사람이 아무리 잠깐이었다지만 무대엔 어찌 섰드랬을꼬). 술을 아예 못 먹는 것도 아닌데 술자릴 가지 않는 것도 취기에 휩싸여 다같이 노래 부르고 취중에나 할 수 있는 ‘닭살 멘트’를 날리는 걸 못 견뎌하기 때문이라니 월드컵 4강 때 우리나라에서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을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시상식장에 갈 때도 언제나 빨간 카펫 대신 뒷문으로 몰래 들어갔으며 마초문화가 너무 싫어 군대에서조차 고참이 주는 술을 한번도 받질 않아서 아예 ‘열외’ 취급을 받았다는 그에게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 고민을 하는지, 만약 시위 같은 것에 동참할 기회가 있으면 하겠는지를 물었다. 그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대답 대신 해줬다. 큰형님이 천주교 교목으로 계시면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이신데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투쟁을 할 때 오셔서 ‘지원사격’을 해주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데 정작 영화인인 자신은 뜻을 같이해 현장까진 갔지만 ‘앞’에 나가는 게 너무 쪽팔려서 바로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걸 보고 동료 영화인들이 놀렸다는 거다.

사진/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선글라스도 쓰지 않은 채 약속장소에 나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말도 너무나 술술 잘했다.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