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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감각을 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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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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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고상한 아름다움을 찾는 두 사람이 보내준 특별한 가을선물

얼마 전 의문의 ‘가을 편지’ 한장을 받았다. 자신의 팔당집 꽃밭에 앉아서 편지를 썼다는데, 꽃밭 풍경이 인쇄된 한지에 적혀 있는 글들은 무안할 만큼 감상적이었다. 특히 이 문장을 읽을 때는 닭살이 돋았다. “샴페인 거품에 목을 애무하고 와인잔에 입맞추며 오늘을 마무리하시지요.” 한참 만에 알아낸 ‘가을 편지’의 요지는, 파크뷰 헤어뉴스의 이상일 원장이 카페 ‘모우’의 확장 오픈에 나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약간 김이 샜지만 그 닭살스러운 아날로그 초대장은 은근히 감동스러운 데가 있었다. 게다가 그 확장한 공간의 이름이 꽤 수상했다. ‘블랙 란제리 룸’이라니, 카페에서 검정 팬티를 팔겠다는 건가?

카페 모우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얇은 검정색 종이에 싸여 있는 불꽃 맨드라미 한 송이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의문의 ‘룸’에 들어서자 동화 속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턱시도 차림의 이상일 원장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신혼여행차 파리에 갔을 때 처음으로 아내에게 속옷을 사줬는데, 그 고급 속옷 가게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충격과 아내가 그날 밤 입은 블랙 란제리의 두근거림이 평생 잊혀지지 않았어요. 그걸 되살리고 싶었죠. 그러니까 이곳은 연인들의 공간이죠.” -그가 다소 여성스러워서 남자 구실 할 수 있을까 의심한 사람이 많다는데, 내가 아는 이 남자는 오십살이 넘은 자기 와이프를 파리에 유학 보낼 만큼 드물게 좋은 남자라, 나로서는 그런 남자가 내 남편이 아니라는 게 원통할 따름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더욱더 이상한 ‘가을 소풍’을 체험했다. 그저 공적인 미팅 자리에 불과했는데, 미팅이 끝나자 포토그래퍼 김용호는 난데없이 언젠가 지나가는 길에 봐둔 끝내주는 정원이 있다며 그곳에 가보자고 했다. 성북동의 성낙원이라는 곳이었는데, 이름은 천상 양로원이나 고아원 같지만 그 실체는 마치 ‘비밀스러운 소쇄원’과도 같은 꿈의 정원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풍류를 좋아하는 한 개인의 사적지였다. 말하자면 일반인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


하지만 김용호가 누구인가? 1920년대 제국주의 양식미에 취해 사는 이 남자는 흰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격식 있는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어린 아들에게 일요일마다 테이블 매너를 가르치는 남자다. 그러면서도 생텍쥐페리의 실종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지극히 소년스러운 사소설을 그저 ‘취미’로 써서 책으로 발행하는 모험가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이 못 말리는 댄디 손에 이끌려 그날 도둑 단풍놀이를 하고 말았다.

처음엔 나도 스탕달과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스탕달은 댄디를 두고 ‘넥타이 잘 매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이’라고 했는데, 나도 처음엔 그들을 ‘사치스러운 것밖에 탐할 줄 모르는 속물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 낭만적이고 사치스러운 반항아들에게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덧없는 감각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탐하는 즐거움’에 대해 배웠다. 어느새 나도 쌀통 쌀 떨어지는 건 몰라도 식탁 위에 꽃 떨어지는 건 못 참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내 집에 오는 방문객을 위해 한 시간 전부터 아무도 없는 마당에 촛불을 켜둘 정도로 병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세계가 허망할수록 외적인 탐미성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나?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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