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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과학의 남성성을 지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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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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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의 연구 풍토에 반기 든 여성과학자들… 생명공학 연구의 여성인권 보호 등 꾀해

과학기술을 성감별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남성’쪽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다. 과학기술 연구자들은 대부분 남자이며, 주요 과학정책 결정자들도 대부분 남자다. 연구현장의 조직문화는 남성 중심의 규율로 채워지고 있다. 또 과학기술은 개발과 개척이라는 남성적 관심사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니 “과학기술은 남성적”이라고 여성주의자와 여성과학자들은 말한다. 최근 영국물리학회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8%가 전형적 물리학자의 모습으로 ‘안경 쓰고 턱수염 기른 남자’를 지목했다는 것도 이런 과학기술의 남성성을 보여준다.

사진/ 과학계에서 활동하는 여성은 알게 모르게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 생명공학연구소에서 한 여성 연구원이 전자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다.(한겨레21)

여성과학자 대부분 취업 · 임금 등 불이익 체험

최근 남성 중심의 과학기술에 대해 국내 여성과학자와 여성단체가 한자리에 모여 목소리를 냈다. 지난 5일 생명공학자 모임인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회장 나도선)과 여성단체인 여성민우회(공동대표 김상희 등)가 연 ‘과학기술의 발전과 여성과학자의 역할’이란 주제의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은 “남성적 과학기술을 여성의 참여 확대로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연구현장의 여성 참여 확대와 여성의 난자를 이용한 배아복제의 생명윤리 문제 등에 각자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과학자단체와 여성운동단체가 함께 기획해 한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 과학기술의 ‘남성성’은 훨씬 더 강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여성과학자는 연구현장에 들어서기도 어려운데다 남성 중심의 연구과정에서 여러 차별을 받고 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이미옥 세종대 교수(생명공학과)는 여성과학자 3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20대 29%, 30대 이상 55%가 남성과학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은 적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90%가량이 불이익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경험한 불이익은 취업과 승진, 연구비 확보, 연구능력 평가 등 전반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설문에 응답한 20대 여성과학자는 91%가 임시직이었으며, 30대도 43%가 임시직인 것으로 나타나 여성 신분이 연구현장에서 남자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임을 보여주었다. 이런 응답결과는 과학계에서는 다른 직종과 달리 성별보다 능력에 따라 채용·평가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과학계에서도 여성차별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진/ 남성의 과학을 여성이 바꾼다. 지난 11월5일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과 여성민우회가 마련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여성과학자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 교수는 “여성과학자들은 다른 여성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육아와 자녀교육의 가사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으며, 나이가 들수록 연구현장의 성차별 문제에 깊게 인식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여성과학자의 차별은 국내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국 도 최근 조사결과를 보도하면서 “영국 여성과학자의 5분의 2가 남자보다 적은 보수를 받는다고 답했으며, 30%가량은 육아문제 등으로 잠시 쉬었다가 복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모혜정 이화여대 교수(물리학)는 ‘개발 위주의 남성적 과학’을 개선하는 데 여성과학자가 적극적인 구실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여성을 소외시킨 채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며 “힘의 과시, 공격성, 개발, 진취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남성적 과학은 이제 생명의 보살핌, 사랑, 평화, 조화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 교수는 “새로운 문명을 위한 방향 전환을 위해 남성적 과학기술은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의 두 다리로 걸어야 하며, 이를 위해 여성 참여는 확대돼야 한다”며 “과학을 물질문명의 도구로 보는 남성적 시각에서 벗어나 생명·환경의 과학과 육아 등 생활과학에도 눈을 떠야 한다”고 말했다.

개발 위주에서 생활과학으로 나아가야

과학기술에 대한 여성의 관심과 참여는 생명공학 시대에 특히 강조된다. 모혜정 교수는 “배아복제 등 생명공학이 발전하면서 여성의 몸이 난자생산 공장으로 전락해 여성의 인권 문제가 새롭게 부각된다”며 “여성의 몸을 이해하는 여성과학기술인들이 여성인권을 보호하는 데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명희 천주교한마음운동본부 생명운동부장은 “생명윤리 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 난자를 채취당해야 하는 여성을 배제한 것은 부당하다”며 생명공학과 성 평등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날 토론회에 대해 나도선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울산대 교수)은 “작지만 뜻깊은 만남”이라며 ”여러 부분에서 아직 오해와 거리가 있지만 두 단체가 만나야 할 이유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말 제정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지원법’에 따라, 지난달 말 여성과학기술인육성위원회(위원장 권오갑 과학기술부 차관)가 구성돼 활동에 들어가는 등 국내 과학기술계에서도 ‘여성’은 더욱 큰 울림을 내는 화두가 될 전망이다. 이달 중순 1차 회의를 여는 위원회는 여성과학기술인의 육성·지원, 여학생의 이공계 진학·진출 촉진, 여성 과학기술인의 채용목표제 등과 관련한 시행방안들을 내놓을 계획이다.

오철우 기자 | 한겨레 사회부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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