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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매트릭스는 철학을 보여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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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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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텍스트에 어설픈 추측과 가설만 난무… 치밀한 계산으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 남겨

<매트릭스>는 단지 하나의 영화가 아니었다. 1편의 충격 이후 <매트릭스>는 영화와 광고, 패션 등에서 수없이 모방되었고, 국내외의 철학자들이 많은 논쟁을 벌였다. 어설픈 추측과 가설이 난무하는 영상 텍스트를 깊이 읽어본다.

1999~2003년 <매트릭스>는 단지 하나의 영화가 아니었다. 1편의 충격 이후 <매트릭스>는 영화와 광고, 패션 등에서 수없이 모방되었고, 국내외의 철학자들이 많은 논쟁을 벌이며 <매트릭스>와 철학을 결합시킨 책들을 내놓았다. 전 세계 동시 개봉- 사실은 미국 시각에 맞춰 다른 나라에서는 새벽에도 개봉하는 ‘제국주의적 개봉’- 의 형식으로 드디어 지난 11월5일 <매트릭스3 레볼루션>이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한 회에 전국에서 10만석이 넘는 영화관 좌석이 이 영화에 할애되었다. 최근 7명의 철학자가 함께 쓴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의 지은이 중 한 사람인 박영욱씨와 함께 <매트릭스>의 세계로 들어가봤다. -편집자

사람들이 흔히 철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이렇게 보자면 철학자의 임무는 ‘영원한 진리란 이것이다’라는 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한 시대를 열었던 대철학자들의 역할을 정반대에서 찾고 있다. 그는 철학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근대 철학을 탄생시킨 데카르트의 ‘코기토’(자아)라는 개념은 세상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완성품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카르트 이후의 많은 철학자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라는 개념을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과업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라는 개념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의 근대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른바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 영화들 혹은 작가들은 영화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진다. 가령 20세기 초반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편집’이라는 장치를 통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졌다. 그 문제의식은 이후 ‘보이지 않는 편집’에 의한 환영주의를 창출하는 고전주의 영화의 틀에 박힌 문법으로 관습화되었다. 이런 관습에 저항해 새롭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 고다르일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철학적인 영화란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가 아니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는 영화야말로 철학적인 영화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


철학적이지 않은, 철학적인 영화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영화 <매트릭스>는 전혀 철학적인 영화가 아니다. 1편부터 3편까지 어느 곳을 보더라도 이 영화 속에서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이 발견되지 않는다. 또 이 영화 속에서 아무리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려고 노력해도 기존의 할리우드 대형 영화들과 크게 구별되는 점이 없다. 고작해야 기존의 공상과학(SF) 영화와 달리 무협영화적 요소가 강하다는 정도일 뿐이다.

◁ <매트릭스> 촬영장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오른쪽 두사람, GAMMA)
어떤 의미에서 <매트릭스>는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는 반동적 영화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영화’라기보다는 ‘말하는 영화’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대사라는 텍스트적 요소에 의해 지배된다. 여기서 영화적 이미지는 그 텍스트적 요소를 부가적으로 보여주는 보조장치로 전락하고 만다. 영화는 거대한 스토리에 의해 전개된다. 그러다보니 대사의 과잉은 필연적 결과다.

보통 난해한 영화는 대사나 설명 없이 영상 이미지를 나열하며, 관객들은 그 이미지들을 머리 속에서 정돈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반대다. 대사가 장황하고 스토리가 많아질수록 관객들은 더 어지럽다. 1편보다는 2편이 더 난해하며, 3편은 그 중간쯤 된다. 대사 혹은 설명의 양과 난이도가 비례하는 기괴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적인 것, 즉 이미지가 시간적으로 구성된 스토리로부터 독립해서 독자적 위상을 갖는 것이 현대 영화의 특징이며,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철학적 영화라면 분명 <매트릭스>는 정반대의 영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이제껏 어떤 영화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철학적 논의들을 낳았다. 말하자면 가장 비철학적인 이유에서 철학적인 영화가 된 셈이다. 이 영화는 ‘텍스트적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다. 가상현실과 실재 세계, 운명과 자유의지, 사랑과 정의, 인식의 한계, 인공지능의 가능성 등 이제껏 어떤 영화도 제기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한꺼번에 쏟아붓고 있다. 한편의 영화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3편의 연작과 보충적인 애니메이션이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 1편에서 네오는 모피어스를 만나 가상현실에 대해 듣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무수한 주제 다루며 쓰는 텍스트로

사실 이 영화에 대해 수많은 논의가 생기는 이유는 그 철학적 주제의 다양함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이 처리되는 방식 때문이다. 영화에서 많은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작 어느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말하는 ‘읽는 텍스트’와 ‘쓰는 텍스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읽는 텍스트’란 이미 텍스트의 의미가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이 없이 그저 주어진 뜻을 이해하는 텍스트다. 이에 반해 ‘쓰는 텍스트’는 상대적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임의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독자 나름대로 새로 그 의미를 써나갈 수 있는 텍스트를 뜻한다.

외관상 <매트릭스>는 ‘쓰는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 운명과 자유의지의 문제로 이 영화에 접근해보자. 과연 이 영화는 그 문제에 어떻게 답했을까 우선 이 영화는 필연적 운명의 지배 속에서도 그것을 원초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1편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은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리고 모피어스가 운명을 믿느냐는 말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어떤 것도 인정하기 싫다고 대답한다. 2편에서 오라클의 예언과 달리 네오가 시온을 포기하고 트리니티를 구하는 것 역시 운명과 상관없는 자유의지의 선택이다. 또한 3편에서 오라클은 스미스가 자신에게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스미스의 분신으로 흡수되는 것을 선택했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결정적 계기들은 모두 운명에 반하는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자유의지다.

◁ 2편에서 ‘더 원’(the one)으로서 스미스와 싸우는 네오.
그러나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네오가 빨간 약을 먹은 것이나 모피어스에 의해 시온의 세계에 들어선 것도 이미 숙명론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네오가 오라클의 예언과 달리 트리니티를 선택함으로써 트레인 맨에 떨어진 것 역시 프로그램적 장치다. 3편에서 그곳은 현실세계와 매트릭스의 중간세계로 설정된다. 과연 그런 곳이란 어떤 것일까? 컴퓨터로 비유하자면 운영 체제 윈도에 있는 휴지통에 해당될 것이다. 윈도의 휴지통으로 들어간 파일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제 기능을 할 수 없지만 아직 완전히 제거된(deleted)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네오는 완전히 삭제되지 않고 잠재적인 프로그램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네오 자신이 일종의 프로그램임을 암시한다. 그가 곧바로 제거되지 않고 휴지통에 보관되어 있음은 다시 프로그램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라클과 아키텍트의 대화 장면에서 오라클에게 “위험한 게임을 했다”는 충고는 짜여진 프로그램으로부터 일탈했지만 결국은 프로그램대로 되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모피어스의 믿음대로 네오가 현실세계의 예정된 구원자라면 시온의 세계 역시 매트릭스와 다를 바 없는 예정된 세계로 해석할 수 있다.

보는 사람 맘대로 다양한 해석 가능

이렇듯 이 영화는 보는 사람 마음대로 새롭게 쓸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철학적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라고 단정짓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영화가 서로 모순된 해석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철학적 관심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즉, 무수히 많은 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다는 것보다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철학적 논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는 ‘열린 텍스트’인 것이다.

▷ 떠들썩한 전편을 거쳐 이제 개봉한 3편은 흐지부지한 결말을 보인다. 중간 세계에서 프로그램 가족과 만난 네오.
그러나 이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외관상으로만 열린 텍스트의 형태를 취할 뿐이다. 이 영화의 다의적 해석의 가능성은 텍스트의 형식적 특성이 아니라 논리적 비일관성이나 설명되지 않은 가설에서 비롯된다. 가령 영화의 가장 중요한 축인 주인공 네오가 ‘왜 시온을 위해 매트릭스와 대결해야 하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1편에서 네오는 호기심에 이끌려 자신의 의지대로 매트릭스와의 대결을 선택한다. 하지만 2, 3편을 지나면서 그 자신 역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네오는 스미스라는 프로그램상의 버그를 수정하기 위한 또 다른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굳이 시온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이 부분은 수많은 억측과 가설로 설명될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전제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상한 결말이야말로 <매트릭스>답다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모순들이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네오는 기계와 거래한다. 하지만 애초 스미스를 제거하도록 프로그램된 네오와 기계가 협상해야 할 납득할 만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있다.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스미스가 제거됐더라도 과연 영화가 애초 해결하려던 갈등이 해결된 것인지도 의문이다. 1편에서는 모피어스가 인간의 적을 매트릭스 자체 혹은 그것을 만든 기계로 규정했다. 말하자면 영화는 인간 대 매트릭스(=스미스)의 대립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화는 인간과 스미스, 기계와 스미스의 대립구도로 바뀐다. 그 순간 인간과 기계의 대립은 무의미한 것으로 흐려지고 만다. 그래서 영화 사상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흐지부지한 매트릭스의 결말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관객이나 평론가들에게 실망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흐지부지한 결말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매트릭스>다운 결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워쇼스키 형제는 전편을 통해 이미 무수히 많은 ‘책임질 수 없는 이야기’들을 떠벌여놓았다. 그것을 수습하는 길은 한 가지다. 이야기를 미완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적어도 <매트릭스>는 ‘포스트모던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다. 그런데 씁쓸한 사실은 그 계산이 모든 것을 정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외관상 ‘열린 텍스트’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무수한 뒷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경제적 계산이라는 것이다.

△ 인간세계와 기계의 최후 결전은 25분의 장대한 액션 장면으로 보여진다.

박영욱 | 고려대 철학과 강사 ·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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