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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돈줄 있어야 예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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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13 00:00 수정 : 2008-09-1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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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의 숨겨진 주역 ‘패트런’의 세계… 예술가 경제적 지원해 작품 탄생의 토대 마련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관 벽마다 가득 걸린 서양 근대 회화들은 관람객을 주눅들게 할 지경이다.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이고 치밀한 묘사의 그림들이 수없이 걸려 있어 하루 종일 돌아봐도 한 박물관의 작품을 다 볼 수 없다. 도대체 이 많은 그림들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었으며, 누가 당시 이 그림들에 돈을 지불했을까?

패트런과 예술가들이 만났을 때

일본의 유명한 미술평론가 다카시나 슈지(도쿄대 명예교수)가 쓴 <예술과 패트런>은 서양 미술사가 천재 예술가들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뒤에는 예술을 후원한 많은 패트런(후원자)들, 패트런들의 엄청난 부를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 경제 등 여러 조건이 있었다. 예술작품의 경제적·물질적 지원자이며, 예술가를 이해하고 자신만의 안목을 가지고 작품을 평가하는 패트런들 역시 서양 미술사의 숨겨진 주역이었던 것이다.

▷ <예술과 패트런>, 다카시나 슈지 지음, 신마원 옮김, 눌와 펴냄.
패트런은 아마도 15세기 피렌체에서 처음 등장했다. 14세기까지 서양의 미술가란 석공조합(조각가)이나 약공상조합(화가)에 소속된 천한 직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15세기가 되면 예술가로서 자각한 미술가들이 나타나고, 자랑스럽게 그림에 자신의 서명을 하거나 그림의 일부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넣는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라파엘로는 교황청에 나갈 때 언제나 화려하게 차려입고 쉰명이 넘는 제자들을 모두 이끌고 다녔으며, 교황과도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뒤에는 라파엘로 같은 뛰어난 예술가의 역량을 인정하고 평가하며 활약의 터전을 마련해준 패트런들이 있었다. 물론 패트런들이 그들을 지원한 것은 ‘누가 더 힘이 세고 부유한지, 안목이 높은지’ 과시하고 경쟁하기 위해서였지만, 패트런과 예술가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양 미술사는 폭발하듯 발전할 수 있었다.


처음엔 동업자조합이 패트런의 역할을 맡았다. 나사(羅紗)직물상, 약종상, 모직물상 조합과 같은 동업자 조합은 경쟁적으로 더 훌륭한 작품을 세워서 조합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1401년 피렌체의 산 조바니 대성당 세례당의 ‘천국의 문’은 나사직물상 조합이 콩쿠르를 거쳐 뽑힌 기베르티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조각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신인 기베르티가 역시 젊고 재능 있는 경쟁자 부르넬리스키를 제치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조합이 청동이 적게 드는 기베르티의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주었기 때문이다.

뒤를 이어 더욱 강력한 패트런으로 등장한 것은 메디치 가문처럼 시민 출신의 부유한 대가문이었다.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들의 행렬>(1459~69)에는 메디치 가문 남자들의 얼굴이 행렬 가운데 초상화처럼 남아 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15세기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10개 가문이 피렌체의 부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상황을 당시의 메디치가 등이 냈던 세금액과 일반 가정이 낸 세금을 비교해가며 증명해 보인다. 또 당시의 집값과 미술품 가격과 유력 후원자들의 재산을 비교해 부유함이 예술에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교황이나 추기경 같은 고위 성직자, 군주들도 중요한 패트런이었다. 특히 성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긴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면죄부와 성직을 팔았던 종교적 과오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교황권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들을 후원해 결국 많은 예술작품을 남겼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열렬한 후원자이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티치아노의 붓을 집어주기도 했다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반다이크를 지원했던 찰스 1세처럼 많은 군주들도 화가들의 패트런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우리 곁에 오기까지

근대적 의미의 시민, 즉 부르주아 탄생 이후 미술의 패트런은 점점 대중화된다. 19세기 도시 중산계급이 경제의 주요한 담당자가 되면서 예술을 지원하는데, 이들은 종종 경멸적 뉘앙스가 담긴 ‘졸부’ 또는 ‘벼락출세자’라고 불렸다. 경제적 실력은 있지만 취미의 전통이나 문화적 교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 점에 열등감을 느꼈던 그들은 예술도 이해할 줄 아는 교양인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걸작 한두점은 자기 집에 걸고 컬렉션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 또 이들에게 팔릴 수 있는 작품을 골라내기 위해 입선 방식이 도입됐다.

18세기 말에는 공공 미술관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국가와 (미술관 입장료를 내는) 일반 국민들도 중요한 패트런으로 등장한다. 패트런의 대중화와 함께 비평가와 저널도 미술계에 새로 등장했다. 미술에 ‘무식한’ 대중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술은 이렇게 해서 ‘우리’ 곁에 왔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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