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문화는 자유무역 대상인가]
유성민/ 대전 보문고 2학년
국산 RPG(롤플레잉 게임)인 <창세기전> 시리즈를 즐겼던 난, 얼마 전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의 시라노와 메르세데스의 그림을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근육질 시라노, 글래머 메르세데스. 그것은 한국의 원판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수정된 일본판 <서풍의 광시곡>의 일부였다.
문화산업의 교류는 이처럼 현실이 되었다. 개방, 혹은 문화보호의 당위를 논하기 전에, 문화산업의 교류와 이를 통한 상호 ‘문화개방’이 이미 현실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현실이라 해서 그것이 이상일 순 없으며, 현재가 옳다는 보장도 할 수 없다. 하나 무조건 ‘현실 부조리’를 논함도 어폐가 있다. 때문에 무조건 우리 문화에 대한 타문화의 ‘공습’이라고만 생각하기 전에, 냉철하고 포괄적으로 생각한 다음 현재에 대해 말해야 한다.
최근 ‘미국의 친구’인 노무현 대통령의 스크린쿼터 관련 발언에 상당한 우려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우려를 표명한 이들은, 문화산업은 특별한 것이고 문화의 다양성을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굴종시키는 것은 문화의 중요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성토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내년부터 전면 개방되는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일본의 실로 강력한 애니메이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하청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간간이 들려온다.
물론 세계의 문화는 다양하며, 그 모두는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호를 넘어선 폐쇄는 또 다른 문화 보호책인 문화의 전파와 융합을 어렵게 만든다. 사실 최근 일본까지 상륙해 엄청난 열풍을 지속하고 있는 ‘한류’는 ‘개방’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우리의 문화수출은 좋고 남에게의 개방은 굴복이라는 것은 적합한 시각이 아닐 것이다. 송두율씨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맥도널드 버거의 맛이 모두 다름을 지적하며, 지구화 시대에도 ‘지역화’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보존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민족을 이루는 주요소인 ‘문화’는, 오히려 잦은 교류로 인해 그 핵심은 보존되고, 잎사귀가 더 풍성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문화개방에 대해 하청이니 굴복이니 하는 것부터가 지나친 패배주의이자 지구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은 아닐까? 물론 현재 미국의 행태는 자유무역을 빙자한 문화제국주의적인 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하다 해서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경제적, 문화적 손해가 문제될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살을 주고 뼈를 얻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 우린 자생력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고려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던 극장 점유율 40%를 우린 몇년 전에 이미 넘지 않았던가? 극장 점유율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다시 반대한다면, 이는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빌미를 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상륙을 저지하기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상륙하여 우리 문화를 그들에의 트로이의 목마로 활용하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스크린쿼터를 지키겠다는 고집보다는 과감히 그것을 축소하고, 오히려 직배사들의 ‘영화 끼워팔기’, 즉 대작 영화에 별 볼일 없는 영화까지 묶어 팔았던 관행에 대한 단호한 규제를 가해 우리와 미국의 질 좋은 영화를 공정경쟁시키는 것이 ‘자유무역’의 원리에도 합당하며, 우리 문화를 지키는 첩경이 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와 익스플로러의 끼워팔기로 미국 내에서 상당히 논란이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규제가 하등 제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살을 내주고, 끼워팔기 관행에 대한 철퇴로 공정경쟁을 도입하는 뼈를 취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결과가 아닐까? 송두율은 ‘맥도널드화’에서 지역에 따라 같은 것이라도 새로운 특성을 갖게 됨을 발견했다. 이를 문화에 대입하면, 우리에게 살아남으려는 타문화는 단순한 전파가 아닌 합작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히려 그들의 문화 현지화 노력으로 문화가 발전하고 새 문화가 지역마다 창달될 것이다. 우리의 <서풍의 광시곡>이, 일본으로 가 새롭게 그들에 맞도록 변화한 것처럼. 한류 앞에서도 기모노와 아오자이는 건재하다. 그처럼 우린 양복과 개량한복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민족이 사라질 수 없듯, 문화도 사라질 수 없다. [ 칭찬과 아쉬움 ] 이번주도 행복했다. 지난주에 이어 ‘행복한 고민’은 계속됐다. 유성민, 표신우, 고은미, 김호빈. 영화평으로 치면, 별 네개 반을 주고 싶은 글들을 써보낸 이름들이다. 사실 처음에는 표신우 학생의 글을 뽑을 생각이었다. 거창고 표신우 학생의 글이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장한 ‘문화는 자유무역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대표하고 있고, 그 중에서 가장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번을 되풀이해서 글을 읽고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을 이주의 예컨대 글로 뽑았다. 막상 결정을 뒤집은 뒤에도 고민을 멈추기는 어렵다. 그래서 서둘러 칭찬과 아쉬움을 써보내기로 스스로를 다그친다. 유성민 학생의 글은 스크린쿼터 유지 주장에 담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 한결같이 스크린쿼터 사수를 주장한 글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목소리였다. 유군의 글은 단순히 색다른 논리를 한번 던져 보는 치기를 넘어 다른 목소리의 근거를 현실을 통해 논증하는 ‘공력’을 보이고 있다. 우선 유성민 학생은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를 “우리 문화에 대한 공습”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리고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고려할 수 있는 마지노선 이라던 극장 점유율 40%를 우린 몇년 전에 이미 넘지 않았던가”라며 스크린쿼터 사수론자들의 논리를 공박한다. 그리고 한국인의 모순된 태도를 제시한다. “‘한류’는, ‘개방’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복과 개량한복이 공존하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유군의 글은 현실을 근거로 비판의 칼을 세우고, 적절한 비유를 통해 글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무엇보다 글이 빠르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옥의 티’를 꼽자면, 스크린쿼터가 어떤 면에서 문화 보호를 넘어서 폐쇄로 생각될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혔어야 했다. 이전에도 유군은 예컨대에 보내온 글들을 통해 급진적인 논리를 현실적인 근거를 통해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왔다. 거창고 표신우 학생은 문화가 자유무역에 무차별로 노출된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논리의 다른 글들이 문화의 정의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 등을 논증하느라 지면을 낭비한데 비해, 그의 글은 이런 사족 없이 주장의 핵심을 간결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치밀한 구성과 깔끔한 문장이 논리의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상품을 공급해야한다는 요구를 자유무역의 구조는 제공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거도 풍부했다. 흠 잡을 데 없는 글이었으나, 글의 흐름이 너무 평이해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밖에도 “세계가 WTO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정신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는 인상적인 표현을 쓴 수원 영덕고 고은미 학생, “‘문화의 세계화’라는 담론은 ‘문화산업의 세계화’로 변질되었다”고 핵심을 지적한 부평고 김호빈 학생의 글도 당선작 못지 않은 수준높은 글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황은아
물론 세계의 문화는 다양하며, 그 모두는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호를 넘어선 폐쇄는 또 다른 문화 보호책인 문화의 전파와 융합을 어렵게 만든다. 사실 최근 일본까지 상륙해 엄청난 열풍을 지속하고 있는 ‘한류’는 ‘개방’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우리의 문화수출은 좋고 남에게의 개방은 굴복이라는 것은 적합한 시각이 아닐 것이다. 송두율씨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맥도널드 버거의 맛이 모두 다름을 지적하며, 지구화 시대에도 ‘지역화’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보존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민족을 이루는 주요소인 ‘문화’는, 오히려 잦은 교류로 인해 그 핵심은 보존되고, 잎사귀가 더 풍성하게 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문화개방에 대해 하청이니 굴복이니 하는 것부터가 지나친 패배주의이자 지구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은 아닐까? 물론 현재 미국의 행태는 자유무역을 빙자한 문화제국주의적인 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하다 해서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경제적, 문화적 손해가 문제될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살을 주고 뼈를 얻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 우린 자생력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고려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던 극장 점유율 40%를 우린 몇년 전에 이미 넘지 않았던가? 극장 점유율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었음에도 다시 반대한다면, 이는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빌미를 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상륙을 저지하기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상륙하여 우리 문화를 그들에의 트로이의 목마로 활용하는 게 더 현명할 것이다. 스크린쿼터를 지키겠다는 고집보다는 과감히 그것을 축소하고, 오히려 직배사들의 ‘영화 끼워팔기’, 즉 대작 영화에 별 볼일 없는 영화까지 묶어 팔았던 관행에 대한 단호한 규제를 가해 우리와 미국의 질 좋은 영화를 공정경쟁시키는 것이 ‘자유무역’의 원리에도 합당하며, 우리 문화를 지키는 첩경이 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와 익스플로러의 끼워팔기로 미국 내에서 상당히 논란이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규제가 하등 제한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로 살을 내주고, 끼워팔기 관행에 대한 철퇴로 공정경쟁을 도입하는 뼈를 취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결과가 아닐까? 송두율은 ‘맥도널드화’에서 지역에 따라 같은 것이라도 새로운 특성을 갖게 됨을 발견했다. 이를 문화에 대입하면, 우리에게 살아남으려는 타문화는 단순한 전파가 아닌 합작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히려 그들의 문화 현지화 노력으로 문화가 발전하고 새 문화가 지역마다 창달될 것이다. 우리의 <서풍의 광시곡>이, 일본으로 가 새롭게 그들에 맞도록 변화한 것처럼. 한류 앞에서도 기모노와 아오자이는 건재하다. 그처럼 우린 양복과 개량한복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민족이 사라질 수 없듯, 문화도 사라질 수 없다. [ 칭찬과 아쉬움 ] 이번주도 행복했다. 지난주에 이어 ‘행복한 고민’은 계속됐다. 유성민, 표신우, 고은미, 김호빈. 영화평으로 치면, 별 네개 반을 주고 싶은 글들을 써보낸 이름들이다. 사실 처음에는 표신우 학생의 글을 뽑을 생각이었다. 거창고 표신우 학생의 글이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장한 ‘문화는 자유무역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대표하고 있고, 그 중에서 가장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번을 되풀이해서 글을 읽고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을 이주의 예컨대 글로 뽑았다. 막상 결정을 뒤집은 뒤에도 고민을 멈추기는 어렵다. 그래서 서둘러 칭찬과 아쉬움을 써보내기로 스스로를 다그친다. 유성민 학생의 글은 스크린쿼터 유지 주장에 담긴 민족주의를 비판하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 한결같이 스크린쿼터 사수를 주장한 글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목소리였다. 유군의 글은 단순히 색다른 논리를 한번 던져 보는 치기를 넘어 다른 목소리의 근거를 현실을 통해 논증하는 ‘공력’을 보이고 있다. 우선 유성민 학생은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를 “우리 문화에 대한 공습”으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리고 “영화계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고려할 수 있는 마지노선 이라던 극장 점유율 40%를 우린 몇년 전에 이미 넘지 않았던가”라며 스크린쿼터 사수론자들의 논리를 공박한다. 그리고 한국인의 모순된 태도를 제시한다. “‘한류’는, ‘개방’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양복과 개량한복이 공존하는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유군의 글은 현실을 근거로 비판의 칼을 세우고, 적절한 비유를 통해 글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무엇보다 글이 빠르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옥의 티’를 꼽자면, 스크린쿼터가 어떤 면에서 문화 보호를 넘어서 폐쇄로 생각될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를 밝혔어야 했다. 이전에도 유군은 예컨대에 보내온 글들을 통해 급진적인 논리를 현실적인 근거를 통해 제시하는 능력을 보여왔다. 거창고 표신우 학생은 문화가 자유무역에 무차별로 노출된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논리의 다른 글들이 문화의 정의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 등을 논증하느라 지면을 낭비한데 비해, 그의 글은 이런 사족 없이 주장의 핵심을 간결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치밀한 구성과 깔끔한 문장이 논리의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상품을 공급해야한다는 요구를 자유무역의 구조는 제공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거도 풍부했다. 흠 잡을 데 없는 글이었으나, 글의 흐름이 너무 평이해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밖에도 “세계가 WTO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정신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는 인상적인 표현을 쓴 수원 영덕고 고은미 학생, “‘문화의 세계화’라는 담론은 ‘문화산업의 세계화’로 변질되었다”고 핵심을 지적한 부평고 김호빈 학생의 글도 당선작 못지 않은 수준높은 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