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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논술길라잡이] 의식에 주어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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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1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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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길라잡이 | 사람이란 무엇인가3]

맛도 주입된다?

장면 1 : 어떤 심리학자가 각 연령대의 아이들에게 똥처럼 생긴 초콜릿을 줘봤더래. 그랬더니 말을 배우기 이전의 아이들은 맛있게 잘 먹는데, 말을 배운 애들은 아예 코를 싸쥐고 입도 대지 않더래.

장면 2 : 호남 지역의 잔칫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풍경. 이 동네에서 절대로 빠져선 안 되는 음식이 바로 홍어회인데, 타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아예 입도 안 댄다는 사실. 누구는 잘 삭았다 하고, 누구는 엄청 썩었다는 평가를 함.

종합 : 영화 <매트릭스1>에서 사이퍼가 상대방 대장 제임스에게서 스테이크를 얻어먹으면서 말하길, “이 맛도 주입된 맛이란 말이죠?”


비밀은? 위 얘기를 들으면서 누구는 ‘혀가 길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는 경로는 이래. ‘음식 → 혀 → 맛 → 평가’. 여기서 ‘맛’까지는 누구나 똑같아. 그러나 ‘평가’ 단계로 들어가면서는 달라져.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맛있는 게,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유별나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비밀은 이래. 특정 음식이나 맛과 평가가 맞물려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런 음식, 이런 맛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길들여졌다는 거지. 결국 길들여진 건 평가가 아니라 어떤 가치 판단, 즉 가치 판단을 갖는 언어라는 거지.

언어, 세계를 받아들이는 틀

경험주의자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순서를 ‘나 → 세계 → 평가’라고 봐. 여기서 ‘나 → 세계’를 ‘경험’이라 하고, ‘세계 → 평가’를 ‘인식’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경험 → 인식’이라는 구도로 요약할 수 있어. 꼭 맞는 것 같지? 그러나 앞에서 한 얘기에 따르면 이 구도는 그리 신빙성이 없어. 어느 누구도 순수한 경험에서 자기만의 인식에 도달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람들이 세계를 경험하는 순서에는 뭔가 독특한 것이 끼어들어. 그게 바로 언어야. 알기 쉽게 다시 도식화해볼게. ‘나 → 언어 → 세계 → 언어 → 나’, 이거야. 나는 반드시 언어를 매개로 해서만 세계를 대할 수 있고, 그 언어라는 그물을 통과한 세계만 인식한다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은 언어라는 틀을 통해서만 세계를 대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언어 효과, 선험적인 가치 판단

우리가 ‘엄마’라는 말을 배울 때, 그냥 ‘저 여자는 엄마라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배운 게 아냐. ‘엄마’라 부를 때면 괜히 따뜻하고 편하고 뭐든지 다 들어줄 것 같은 느낌, 즉 ‘가치 판단’까지 같이 배우는 거지. 이처럼 우리가 배우는 말에는 이미- 벌써 어떤 가치 판단이 주어져 있어.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를 대할 때 이미- 어떤 가치 판단이 주어져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인 세상이 과연 ‘객관적’인 세상일까?

여기까지에서 또 한번 내 이성, 내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어. 그러나 우리가 세계를 대할 때, 가치 판단이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뭔가 새로운 대안이 나올 것 같기도 해. 다음 시간에는 이걸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가능성을 함께 찾아보자고.

우한기 | 광주 플라톤 아카데미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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