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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독극물이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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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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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량 독소는 인체에 이롭다는 호르메시스 이론… 저선량 방사선 치료 효과는 의견 엇갈려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재위 BC 336∼323). 그는 만 32살의 생을 미스터리의 죽음으로 마감했다. 최근 사후 2300여년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그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풀어낼 단서가 나왔다. 뉴질랜드 국립독극물센터 레오 수 박사는 고대인이 사용하던 비소나 독미나리 등에 의해 알렉산더 대왕이 독살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은 크리스마스로즈라 불리는 유럽산 미나리아재빗과 식물인 ‘헬르보어’(Hellebore)로 추정된다. 오래 전부터 적은 양의 헬르보어즙은 서양 고대문명 지역에서 변비치료제로 쓰였다. 하지만 한 티스푼 이상의 헬르보어즙은 혈압을 떨어뜨리고 고열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호르메시스 지지자들은 미량의 방사선은 DNA 복구를 촉진한다고 주장한다. 방사선 누출사고가 발생한 월성 원자력 발전소.

약이 되는 독을 찾는 사람들

이처럼 특정 물질이 생체에서 나타내는 생물활성의 기전을 생각한다면 독과 약을 구별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이미 16세기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셀수스는 “모든 물질은 유독하며, 유독하지 않은 물질은 없다. 독이냐 약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양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하나의 물질이라도 생체에 투여하는 양과 형태에 따라 독으로도 약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물, 소금, 설탕도 과량을 섭취하면 유해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는 한잔의 술과 자기 몸과 남을 해치게 하는 술도 같은 에탄올이다. 화학물질에는 미량으로도 독소로 작용하는 것과, 대량일지라도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다.


생물반응이 생체에서 유익한지 유해한지는 습자지 한장 차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게다가 독이냐 약이냐는 것은 인간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기에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DDT의 살충효과는 해충을 박멸하는 유력한 무기로 쓰였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DDT는 이른바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초래하는 유해한 농약으로 간주되고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독과 약이 갈리는 극적인 사례다. 다이옥신과 이온화 방사능은 암을 유발하는 대표적 물질로 알려졌다. 수은이나 납, PCB 등도 지적 성장을 방해하는 물질로 멀리하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이런 유해물질이 실제로는 건강에 유익할 수도 있다. 아편이 치명적인 마약이지만 극소량만 사용하면 복통에 특효가 있는 것처럼.

언뜻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이런 ‘약이 되는 독’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고에너지의 방사능이 세포에 부딪히면 DNA가 파괴되게 마련이다. 방사능 입자들은 가시광선의 광자보다 100만배나 많은 에너지를 가져 종양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의료용 방사선이 인체에 조사되는 과정에서 건강한 생체조직이 파괴되기도 한다. 방사선 과다조사로 치료를 받던 환자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다. 방사선 조사가 위험한 치료로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사선이나 독성물질이 다량으로 사용되면 독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소량으로 사용할 경우 인체에 유익한 효과를 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호르메시스(Hormesis) 이론이다.

방사선 관련 작업 종사자들은 저선량의 방사선에 장기간 노출됨으로써 후대에 유전적 영향을 끼치고 암에 걸릴 확률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상시 소량의 피폭도 정자 수 감소, 염색체 손상, 혈액 중 림프구 수 감소, 탈모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체에 유해한 저준위 방사선에 한번만 노출되면 DNA 복구를 촉진해 생명현상에 이롭다. 실제로 자연 방사능이 상대적으로 많은 고지대 주민들의 수명이 덜 길고 암 발생이 적다는 역학조사가 나오기도 했다. 미국 애머스트의 매사추세츠대학 독극물학자 에드워크 칼라브레세는 “소량의 방사선이 일시적 스트레스 효과를 발휘해 세포를 복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사선이 스트레스에 적응하도록 인체 내의 생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고 호르메시스 효과를 설명한다. 저선량의 방사선이 산소 독성에서 비롯되는 DNA의 돌연변이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연간 약 240밀리렘의 방사선을 받고 있다. 그래서 원전수거물관리센터는 상쾌한 바람(공기)에 연간 120밀리렘, 파란 하늘(우주)에 40밀리렘의 방사선이 나온다며 핵폐기장 부지에서 나오는 1밀리렘의 방사선은 안전하다는 내용을 담은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실제로 바나나, 당근, 담수 녹조인 클로렐라, 규소성 석영질 광물 등에서 미량의 방사선이 방출되고 있다. 이로 인해 방사선 동위원소에서 방출되는 복사선이 흙이나 건축물 등지의 자연계에 흐르게 마련이다. 호르메시스 효과가 있다는 광물이 상업적으로 판매되기도 한다. 폐조직에 손상을 주는 죽음의 기체 라돈은 고혈압, 피부염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세포의 노화를 방지하는 온천수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미량의 방사선 동위원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질병 진단을 위해 100밀리렘 정도의 X선(방사선)을 쬐거나, 암치료에 코발트-60의 감마선를 사용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형광등의 스타터, 야광시계의 문자, 주유소의 표시장치, 건물의 화재감지기 등에도 방사선 동위원소가 쓰인다. 방사선 조사 처리과정을 거치는 제품으로는 각종 PVC제품, 전자제품의 배선에 사용한 잘 타지 않는 전선, 세균을 죽인 주삿바늘과 주사통, 자동차의 타이어, 싹트는 것을 방지한 감자, 라면의 조미료가루 등이 있다. 인체에도 칼륨, 탄소와 같은 극미량의 방사성 핵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마다 흉부 X선 사진을 25번씩 찍을 때 얻는 노출량만큼의 자연 인공 방사선과 더불어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 별이 폭발할 때 생성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방사선.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양성자(a)는 지구 대기권에서 중성자 방사선을 만들며(b) 충돌 과정에서 알파·베타·감마 방사선을 만들어(c) 지상에 도달하게 된다(d).

정말로 방사선은 DNA를 복구할까

정말로 방사성과 같은 독성물질이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호르메시스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저선량의 방사선이 인체에 유익하다는 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인다. 감마선이 쥐의 종양 발생을 억제하는 등 독극물 자극이 생명체에 유익하다는 결과가 잇따라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 히로시마방사선영향연구재단의 통계학자 돌 프레스턴은 “저선량의 방사선도 고선량의 방사선과 마찬가지로 수명을 단축시키는 효과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가 속한 연구팀은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생존자 12만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Gy(방사선 흡수선량) 이상의 피폭에서는 평균수명 단축이 2.6년, 1Gy 이하에서도 평균 2개월의 수명 단축이 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아무리 약이 되는 독이 있다 할지라도 효과가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저선량의 방사선에 일부러 노출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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