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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제대로 멋을 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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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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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자기만의 스타일 있어야 옷도 맵시 살아… 옷보다 돋보이는 다른 매력을 보여다오

언젠가 식당에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물론 주제는 조금도 아카데믹하지 않다. ‘믹 재거는 그 나이에(아마 육십이 다 되었을 걸) 손녀뻘 되는 슈퍼모델 소피 달(세상에서 가장 살찐, 그러나 가장 섹시한 슈퍼모델로 유명한 모델 겸 소설가)을 어떻게 침대로 끌어들였는가’ 하는 문제. 과연 그 힘의 원천은 뭐냐는 거다. 그날 패션 기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가 여전히 그 나이에도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잘 입는 게 아니라, 록스타라는 말을 만든 장본인답게 여전히 죽이게 잘 입는다는 것.

그러나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데이비드 보위가 그렇듯 믹 재거는 원래 멋진 남자다. 게다가 옷까지 잘 입을 뿐이다. 반대로 옷은 록스타 차림인데 얼굴이나 몸이 전혀 따라주지 않거나, 설상가상 지루한 얘기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라면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한 어릿광대일 뿐이다. 다소 고전적인 결론이긴 하나, 남자의 멋내기 취미(예술가들은 그걸 ‘댄디즘’이라고 불렀다)는 일이나 정신과 함께 가야만 숭배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지당한 얘기를 왜 하냐 하면, 이번 시즌 가장 주목받는 신인 디자이너로 그야말로 혜성처럼 떠오른 서상영이라는 디자이너 때문이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정해진 시간 내에 화려하게 꾸민 모델들을 무대 위에 세우느라 정신이 없을 때, 그는 조용히 일반인들을 스튜디오에 데려와서 자기 옷을 입혀놓고는 그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했다. 뮤지션 백현진과 고구마(권병준), 레스토랑 디자이너 신성순,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 다큐멘터리 감독 이난, 영화음악가 겸 그래픽 디자이너 ‘별’ 같은 사람들이 그의 남성복 모델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커리어를 보여줌과 동시에 패션에서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남성복에 대한 서상영의 에스프리는 ‘사람이 멋있어야 옷도 멋있다는 것’인데, 나로서는 천번만번 동감하는 얘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대 위의 모델들에게 단 한번도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없을 만큼 지조 있는(?) 여자지만, 서상영의 그 일반인 모델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서상영의 남자 모델이기 이전에 과거 언제 어느 순간엔가 무슨 이유로든 내 마음을 훔친 적이 있는 남자들이다.


서상영은 남성복에 대한 자신의 에스프리를 몸소 보여준 남자이기도 하다. 패션은 볼거리나 눈요기 이전에 산업이다. 서상영은 남들이 쇼한다고 난리법석을 떨 때 자신의 옷을 보여주는 크로스오버 영상물(자신의 옷을 입은 모델들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고, 그 위에 음악이나 그래픽 디자인까지 덧입힌 영상물)을 만들어 전세계 프레스와 바이어들에게 보냈다. 바이어 없는, 요란하지만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국내 패션쇼 관행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 전력이 프레스들에게 크게 어필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옷 잘 입는 사람들을 예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 나 자신은 옷 잘 입는 남자들을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좀 고리타분한 얘기지만 옷보다 중요한 것이 많아 보이는 남자가 더 좋다. 글램록 스타로 전성기를 누린 70년대의 데이비드 보위보다 나이 지긋한 중년 남자가 다 된 지금의 데이빗 보위가 더 섹시한 이유처럼. 적어도 지금의 그에겐 패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이젠 쇼핑도 하지 않고 패션에 대한 관심도 전무하다는 그의 말이 아니라 얼마 전에 새로 나온 그의 새 앨범이 그걸 증명해준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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