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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이언스크로키] 평균인의 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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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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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현대를 상징하는 표현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런데 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통계학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있다. 통계 자체의 기원은 아득한 고대까지 올라간다. 그 시대에도 인구조사, 토지조사 등 기본 통계작업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확률론과 결부되어 시작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계학은 중세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방대한 자료를 효율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통계학의 본질상 그 능력이 일반적으로 널리 응용되기 위해서는 컴퓨터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엄청난 통계자료가 범람한다. 각 개인의 삶과 전체 사회의 설계 및 운영은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통계학이 점진적 발전을 해가던 19세기 중엽 벨기에 통계학자 케틀레는 사람들의 육체적·정신적 여러 특징을 수집해 나이, 직업, 인종 등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런 작업에서 얻어지는 평균적 특징들을 조합해 ‘중간 인간’이라는 가상 존재의 개념을 내세웠다. 오늘날 이 관념은 ‘평균인’으로 불리며, 언론매체들에서 자주 듣는다. 케틀레처럼 인간에 관한 통계에 깊이 매료된 사람으로는 ‘우생학’이란 말을 창시한 영국의 유전학자 골턴이 있다. 그는 진화론을 제창한 찰스 다윈과 사촌간이었다는 점에서 예상할 수 있듯 다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 바, 진화론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며 실제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생학은 바로 이런 주장의 산물이다.

그런데 골턴은 우생학을 연구하던 중 자신의 예상에 어긋나는 역설적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콩 표본을 큰 것과 작은 것의 두 무리로 나누어 재배했다. 이때 큰 콩의 자식들은 부모 콩보다 큰 것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부모 콩보다 작은 것이 더 많았다. 반대로 작은 콩의 자식들은 부모 콩보다 큰 것이 많았다. 그리고 이 작업을 몇 세대 더 계속하면 애초 큰 콩 무리의 후손과 작은 콩 무리의 후손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 결론은 “우수한 형질을 가진 부모를 선택해 후손들을 개선해 간다”는 우생학의 취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골턴은 이 현상을 가리켜 ‘평균으로의 회귀’라고 불렀다. 본래 임의적 분포를 이루던 콩들을 인간의 선택에 따라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래의 분포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자연계의 생물종은 이 현상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대체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유지한다. 즉, 진화와 평균으로의 회귀는 생물계의 거시적 모습을 이끄는 두 주된 동력이다.

최근 ‘사교육 1번지’ 또는 ‘교육 특구’라 불리는 서울 강남구 일원 학생들의 학력에 대한 통계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 인식과 달리 그들의 학력이 크게 앞서지 않는다. 나아가 그곳 출신 학생들의 대학 성적은 오히려 다른 곳 출신보다 더 떨어진다고 한다. 이 현상은 평균 또는 평균인이 발휘하는 자연적 인력의 중요성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실력 가르기를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진화가 아닌 한, 이 인력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물론 세상에는 예외적 현상이 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의 본질은 임의성이므로 각 학생을 인위적 예외로 만든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이번 통계를 계기로 사교육의 역할과 효과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찾아갔으면 한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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