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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수트 입은 남자의 섹스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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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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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유니폼으로 인식되는 슈트도 입기 나름… 노타이 차림 등으로 다양한 느낌 연출

여자든 남자든 ‘넥타이 부대’라고 싸잡아서 ‘양복쟁이’들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슈트는 남자 개개인의 개성을 박탈하는 유니폼쯤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한 미술관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티스트 S의 옷차림을 보고는 난데없이 슈트 입은 남자의 섹스 어필에 대해서 떠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S는 영화음악으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정작 밥벌이는 그래픽 디자인으로 하고, 자신의 정체성은 시인이라고 말하는 좀 특이한 남자인데 평소 그의 옷차림은 청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세련된 캐주얼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때문인지 웬일로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정색 슈트에 하얀 와이셔츠를, 와이셔츠의 맨 위 단추를 하나 풀어서 입은 ‘노타이’ 차림이었는데, 뭐랄까 여러 번 그를 만나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두근거림을 동반한 채 나는 그날 그의 테이블을 여러 번 훔쳐보았다. 검정 재킷에 화이트 셔츠, 청바지를 입는 디자이너 톰 포드 스타일에 비하면 다소 고전적이라 할 수 있고, 노타이 차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혀 고전적이지 않기 때문에 신선하다고 할까?

확실히 슈트에 타이는 반듯해 보이고, 슈트에 노타이 차림은 시크해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휴그랜트와 제레미 아이언스인데, 그들이 넥타이를 풀고 하얀색 와이셔츠의 단추를 한두개 풀고 늘어져 있는 모습은 너무 섹시해서 보고 있으면 사지에 힘이 풀릴 정도다. 사실 남자가 피곤해 보일 때만큼 섹시해 보일 때는 없다. 은연중에 여자들의 동정심과 자비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노타이 차림은 별로 섹시할 일이 없는 ‘먹물’들이 피곤을 가장해 섹스 어필을 도모하기에 가장 손쉬운 옷차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대다수 우리나라 남자들이 ‘노타이룩’은 연예계나 감각파에게만 적용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파이란>의 최민식을 봐라. 구김으로 엉망이 된 ‘대한민국 국가대표 호구’ 인생의 후즐근한 노타이룩도 꽤 볼만하지 않나?

마지막으로 최근 만난 몇몇 남자들의 인상적인 노타이 차림에 대한 나의 어쭙잖은 코멘트. 먼저 얼마 전 패션 행사장에 나타난 탤런트 김주혁은 핀 스트라이프 슈트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무척 세련된 도시인처럼 보이긴 했지만 너무 완벽해서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결국 이 말은 별로 섹시하지 않았다는 말). 그리고 에르메스 미술상 시상식장에서 만난 문제의 두 남자. 검정 벨벳 재킷에 화이트 셔츠, 그리고 분홍색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화려한 스카프를 착용한 어느 프랑스 남자의 옷차림은 그 ‘케니지 머리 모양’만큼이나 유니크했지만 역시 좀 광대처럼 보였다. 그리고 왕년에 잘나가는 모델이었다는 D선생님은 재킷 안에 입은 검정색 목폴라 니트와 발목으로 갈수록 통이 좁아지는 슬림한 검정 바지가 절묘하게 매치되어 여자 등쳐먹는 사기꾼처럼 보였다는 비보를 전한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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