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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인간을 위하여/ 이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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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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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부터였나, 젊은이들이 자기 학번이나 나이를 말해야 할 때면 ‘저주받은~’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학번이에요”하는 식으로. 입시건 취직이건 워낙 어렵다보니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조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별명이 해피맨일 정도로 맺힌 데 없이 흐물한 성격이라 내심 걱정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전공인 전자공학과 취미인 음악을 둘 다 살릴 수 있는 직장이며 보수도 좋다는 게 아닌가. 그 축하 자리에 갔다가 나는 조카의 미래 설계를 듣고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부동산 임대업이 꿈이었다. 회사에 다녀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아파트를 사서 파는 식으로 돈을 불려 빌딩을 산 다음 임대 수입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애를 누가 이렇게 가르쳤어’하는 식으로 사방을 째려보았지만 다들 ‘그렇지, 잘 생각했군’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드러난 교육과 숨겨진 교육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이로울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렇게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돈을 빌려준 다음 이자를 받아 먹고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할지도 모른다. 그게 정말 떳떳하기만 하다면.’ - 카토

일러스트레이션 | 이우만
우리의 가치관은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변했다.


60년대인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반에 예쁘고 참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고리대금업을 한다고 하여, 어른들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선을 그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또 80년대였던가. 부부교사가 부업으로 술집을 열었다가 장사가 잘되자 남편이 교직을 그만두고 술집을 하나 더 열었다고 숙덕거렸던 기억도 있다.

2000년대인 오늘, 직업에 갓 입문한 청년이 돈 놓고 돈 먹는 투기를 해서 그 열매로 잉여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주저 없이 밝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제도의 문제, 시장원리의 불안정성, 인플레이션과 저금리 등등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학교 교육이 보편화되고 학력이 축적되어갈수록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드러난 교육내용과 숨겨진 교육내용은 정반대이다. 교과서에는 ‘친절하라, 남을 생각할 줄 알라, 서로 도우라’고 써 있지만 학교생활을 통해 은연중 ‘인정사정 보지 마라, 수단 방법을 다하여 경쟁하라,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삶의 방식을 가르친다.

이런 숨겨진 커리큘럼은 드러난 커리큘럼보다 훨씬 강력하게 각인되게 마련이며, 시장원리가 지배해야 한다는 사회적 현실에 의해 보충학습 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경쟁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퍽 고리타분해진 느낌이다.

얼마 전 학생이 질문했다.

소설의 주제, 꼭 있어야 해요? 그냥 즐거우면 되잖아요?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왜 읽었나’하는 의문이 든다면 도저히 즐거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울해진다. 심지어는, 땅을 판 다음 판 구멍을 다시 메워야 하는 고역을 치른 것처럼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에는 보람이나 의미를 찾으려는 성향이 있고, 그게 채워지지 않으면,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게 되고, 직업이 고역이 되고, 우울증으로, 자살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의미와 보람이라는 것

자신의 삶에서 의미와 보람을 느낄 때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그러니 요즘 학교 교육은 교육이라기보다 직업훈련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다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도 있지만 우리를 인간답게 살도록 해주는 것은 엄청난 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당하게 하지 말라는 맹자의 말. 입장을 바꿔 생각하자, 세상에 공감할 줄 알고 남에겐 친절할 줄 알자는 것, 이 정도이다. 알음알이로는 엄청 단순하다. 이 단순한 원칙대로 살 수 있도록 익히는 게 바로 교육인 셈이다.

교육은 살아 있는 사람을 보고 익히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겠지만, 그렇게 다 채우지 못할 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책이다. 책을 통해 다른 인간을 만나거나 다른 인생을 대신 살아보고, 그를 통해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키워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경쟁에는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 하여 내쳐지고 있는 소설책 같은 부류가 공감능력을 키우는 데 힘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남희 | 소설가

** 이남희씨의 책에세이는 이번호로 마칩니다. 다음호부터는 박남준 시인의 칼럼이 4주 동안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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