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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문화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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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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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출장과 저녁 나절의 술 한잔까지 겹쳐 눈뜨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겁다.

아침 7시50분까지 실내체육관 앞에 모여 차량 통제하기로 했는데 ‘아뿔싸’ 눈뜨니 7시20분이다. 허둥지둥 정신없이 벼룩시장에 낼 물건, 옷걸이 챙겨 작은아들 학교 데려다주고 행사장에 오니 벌써 8시 반이다. 이미 많은 차들이 주차해 있고 벼룩시장 터로 사용하려는 곳엔 부지런한 어르신들이 나락을 널어놓은 지 오래인 듯하다.

공연터로 예정된 곳엔 트럭이 세워져 있고 가까스로 주인과 연락은 되었으나, 영암인데 밤늦게나 돌아올 예정이니 알아서 차를 치워보란다.

밀고 당기고 하며 겨우 멍석 2장 깔 장소 확보하니 청소차가 들이닥친다.

“죄송합니다. 오늘 문화광장 행사가 있어서요. 다른 곳에 주차 좀 해주세요”라며, 기사 아저씨께 사정 이야기 드리니 이맛살을 찌푸리기는 해도 선뜻 인심 좋게 자리를 뜬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어제 오후에 천정리 논둑에서 베어온 기린초랑, 억새풀 항아리에 꼽고 걸개그림 아래 멍석 깔아 앰프 설치하니 제법 공연장 같다.


성교육, 복주머니, 민속놀이, 부침개, 풍선예술, 벼룩시장, 인라인스케이트 등 7개 공연터에 천막을 친다, 파라솔을 편다, 책상을 배열한다 하며 덩치 큰 물건들과 3시간여 실갱이 끝에 제법 문화광장 꼴이 되어간다.

오후 1시부터 행사가 진행될 예정인데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12시가 조금 넘자 바로 옆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져나온다. “여러분, 오늘 1시부터 5시까지 이곳에서 ‘문화야 안녕 놀이야 놀자!’ 행사를 해요. 점심 먹고 다들 놀러오세요”라며 정민씨는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고 주유소 일 작파하고 나선 경진씨의 경쾌한 손놀림에 신시사이저 소리가 행사장을 울린다.

“야, 성교육이다” 하며 여중생들 몰려오고 “생리주기 팔찌” 재료 달라고 아우성이다. 아이들의 성의식을 조사하는 스티커 판에 빨갛고 파란 스티커가 자리를 메우고 피임기구를 들여다보며 질문공세가 거세다.

널뛰기 코너엔 아이들이 어설프게 하늘을 날고 제기와 복주머니 만들기엔 엄마들까지 열심이다.

벼룩시장 터에 일찌감치 자리잡았던 큰아들은 게임CD 4장 팔아 번 4천원으로 동생 장난감이며 책들을 몇권이나 사놓았다. 작은아들놈은 인라인스케이트 타느라 정신이 팔려 코끝도 안 보인다.

공연장에 둘러선 아이들은 성지고의 ‘수화’, 법성상고의 ‘춤’, 남자 고등학생들로 구성된 힙함팀의 공연이 끝나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인 세례를 퍼붓는다. 개런티를 김밥 한줄로 때우려니 미안하기도 기특하기도 하다.

저희 선생님이 사회 본다고 올망졸망 모여앉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댄스 실력에 환호하고 필리핀에서 시집온 새댁들도 흥에 겨워 신나게 춤을 춰 보인다.

부침개 터에 길게 늘어선 줄이 안타깝지만 첫 준비의 소홀함으로 돌릴밖에….

여성의전화, 원불교여성회, 성당 생명과평화지기, 여성문화연구소 4개 단체가 모인 ‘영광여성자치연대’의 첫 대중자치 활동은 이렇게 깊은 가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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