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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이래도 미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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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29 00:00 수정 : 2008-09-17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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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를 예술의 원동력으로 삼은 아웃사이더 아티스트 27명의 놀라운 성취

▷ 『아웃사이더 아트』, 장 뒤뷔페 외 지음, 장윤선 옮김, 다빈치 펴냄.
피카소와 뒤뷔페. 물론 20세기의 스타 피카소만큼 장 뒤뷔페(1901~85)는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다. 하지만 피카소가 르네상스 이후 서양 전통 미술을 철저히 분해하고 파헤치는 데 빛나는 소질을 보여줬다면, 뒤뷔페는 벽의 낙서, 암굴 벽화, 어린아이나 정신질환자의 그림 같은 아웃사이더들의 작품에서 미술의 원초성을 발견하는 천재적 안목을 보여줬다. 어려서부터 신동이었던 피카소가 사춘기를 벗어나면서 여러 편의 걸작들을 줄줄이 쏟아낸 데 비해, 뒤뷔페는 두번에 걸쳐 그림을 포기하고 초기 작품을 전부 파괴하고 난 뒤 마흔줄에 들어서야 자신의 길을 찾았다. 미술계 내부에 만연한 엘리트주의와 자기과시, 자본의 힘에 질려 있던 뒤뷔페가 대안으로 제시한 예술은 ‘아르 브뤼’(Art Brut·가공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예술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였다. “이 세상 사람이 모두 화가이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것에나 연필로 그림 그리는 것은, 말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던 광기의 예술가

그는 칭찬이나 이익 등과는 관계없이 절대고독 속에서 작가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예술만이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광기야말로 예술의 원동력이라고 여겼다. “지혜로운 미술이라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미술이란 도취와 광기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 하인리히 안톤 뮐러의 <다루슈 아저씨>(1917∼22).
뒤뷔페가 그토록 열광했던 ‘아르 브뤼’의 숨은 작가들을 보여주는 책이 나왔다. ‘아르 브뤼’의 영어식 표현인 ‘아웃사이더 아트’에서 이름을 따온 <아웃사이더 아트>는 수십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거나 노숙자로 인생을 마치거나 평생 가난한 무명씨로 살았던 27명의 작품을 담았다. 이들은 평생을 고독과 소외, 질시, 감시와 몰이해 속에서 그저 그리고 싶어서, 또는 무언가에 이끌려서 붓질을 계속했다.


가령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빌 트레일러(1854~1947)만 봐도 그렇다. 미국 남부 목화농장의 흑인노예 출신인 그는 가족도 다 잃은 채 말년엔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는데, 85살 나이에 붓을 생전 처음 잡은 뒤 매일매일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3년 동안 그린 1500장의 그림들은 간결한 선과 균형 잡힌 재치, 절제 있는 색채가 어울려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 아돌프 뵐플리의 <스페인, 로다나스>(1910).
엄격한 집안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두운 지하실에서 자라났던 매지 길(1882~1961)은 심령술에 빠지면서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지배하는 ‘머나인레스트’의 영매가 되어 남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침대 위에서 무표정하면서도 꿈에 잠긴 듯한 수많은 흰 얼굴들을 그렸다. 유아강간 미수, 소녀강간 미수로 쉴 새 없이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던 아돌프 뵐플리(1864~1930)는 사회적 부적응자인 동시에 ‘아르 브뤼’의 대표적 예술가로 손꼽힌다. 난폭한 행동으로 위험시되어 20년 가까이 정신병원의 독방에 격리됐던 그는 2만5천여쪽에 달하는 이야기에 콜라주, 드로잉, 작곡, 글 같은 공상적 삽화를 곁들여 가공의 자서전을 창조해냈다. 조카에게 보내는 유서 형식의 <지리학과 대수학의 서>(1912~16)는 거대한 ‘자본 재산’이 나타나 우주를 매입하고 새로운 도시를 개발해 ‘성 아돌프 거대 창작물’을 제작한다는 내용인데 그는 절정기엔 스스로를 ‘성 아돌프 2세’라고 칭했다.

◁ 실뱅푸스코의 <붉은 여자>(1938).
이런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 중엔 사려 깊은 의사의 눈에 띄어 창작활동에 전념할 기회를 얻는 이도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도 많았다. 프랑스 리옹 출신인 실뱅 푸스코(1903~40)는 알제리 부대에 강제 징병된 뒤 신병을 괴롭히는 관행에 침묵시위로 저항하다 실어증과 정신병에 시달렸다. 32살 때 병원 큰 방 벽면에 나뭇잎과 돌조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누드의 색채감이 두드러진 풍만한 여성상을 열심히 그려댔다. 그의 기행은 1940년 종말을 맞으니, 당시 전시 상황에서 프랑스는 전국 정신병원에 물자를 통제해 수천명에 달하는 환자가 기아에 내몰렸는데, 실뱅 푸스코 역시 이 대량학살의 희생자로 기록되고 있다.

▷ 시바 세쿨리치의 <자연의 총>(1975).

대부분 비참한 최후… 창조성 약물로 제거

아이로니컬하게도, 미술치료가 성행하기 시작한 1950년대에 이르면 창조적 영감이 끓어오르는 개성 있는 아웃사이더 아티스트가 현저히 줄어든다. 물론 여기에는 신경안정제의 발전으로 망상과 환각을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 배경도 있었다.

“우리가 흥미를 갖는 작가의 창작은 그들의 광기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광기를 부채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치의 망설임 없는 뒤뷔페의 단언을 곱씹으며 다시 한번 반문하게 된다. 과연 누가 환자인가? 어디서부터 광기인가? 광기는 치료돼야 하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예술은 과연 정신병원의 창살 안과 밖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긴 한 걸까?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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