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등교거부는 정당한가]
허혁/ 경기도 수원시 영덕고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가능해진 뒤 시민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자유를 위해 시위와 집회를 열어왔다. 비록 그 시위와 집회가 무슨 이유로,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든 간에 그것들은 민주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 중의 하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부안군민들이 그들의 핵폐기장 건설 철회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이 집단 등교거부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하게 된 것도 민주사회의 성숙과정 중 하나인가?
니부어에 의하면 개인적으로 도덕적이라도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부안군민들도 개개인은 도덕적일지 몰라도 그들의 고향이자 삶터에 핵폐기물이라는 혐오시설이 들어선다는 집단의 갈등이 결국은 자녀들의 등교거부라는 극단적인 사태까지 이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등교거부라는 선택은 이런 집단갈등을 해소하는 도구로 쓰기에는 너무 적절치 못하다. 등교거부라는 대책이 단기적으로는 정부에게나 여론에게나 동점심을 유발한다든지, 어쩔 수 없다는 상황을 인식시키는 데 일조할지 몰라도 가시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결코 그것은 부안군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들 자녀를 위해서도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교육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인격을 수양하고 지식을 쌓아야 하는 의무임과 동시에 그들이 평등하게 배울 수 있는 권리다. 이런 의무와 권리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역사 저편에 있는 수많은 조상들과 선배들이 교육의 불평등 앞에서 일구어낸 땀과 눈물의 소산물이다. 이런 소중한 의무와 권리를 어떤 이유이든 간에 집단이익을 위한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하다. 또한 부모들이 그런 집단이익을 위해 자녀를 볼모로 이용하는 것은 참된 민주주의 의사표현 과정이 아니다. 특히 집단 등교거부 학생들에는 상당수 초등학생도 포함되어 있는데 아직 가치판단의 기준이 올바르게 확립되지 않은 그들에게 부모라는 특권으로 자신들의 투쟁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의 사회성 확립에 있어서 자녀 개인만의 손해가 아니라 이 사회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자녀의 개개인만 보더라도 이미 타 지역 학생들보다 많이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만큼 학업을 보충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많은 문제점이 산재하게 된 원인은 위에서 니부어가 말했던 집단이익에 의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러한 일이 이곳저곳에서 반복될수록 그만큼 피해는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미치게 된다. 여러 학자들은 이러한 윤리적 문제를 사회제도의 개선에 의해서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정부가 이제껏 보여왔던 안이한 정책수립 과정과 태도에 대해서 성찰하게 되고 피해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는 말이다. 분명 학생들이 자신의 고장을 위해 시위나 집회에 참가한다는 것도 다른 면에서는 산 교육임과 동시에 민주사회가 한층 성숙되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한 채, 자신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반쪽짜리 투쟁은 결코 좋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옛말에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교육은 국가적·민족적으로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교육을 볼모로 잡는 일은 사라졌으면 한다. 그들이 자신의 고장을 위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등교거부라는 단 한 가지뿐일 리는 없다. 학생들 자신이 좀더 성숙된 의식을 갖고, 부모님들은 자녀와 또 사회를 위해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그런 민주사회의 한 투쟁방식이 정착했으면 좋겠다.
[ 칭찬과 아쉬움 ] 이번주 예컨대 논술글로는 허혁 학생의 글이 뽑혔다. 허혁 학생의 글은 주제 집중력이 좋고 논리 전개가 선명해 눈길을 끌었다. 돋보이는 주제 집중력은 무엇보다 적절한 인용에서 나왔다. 허혁 학생은 니부어의 “개인적으로 도덕적이라도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말을 논술글 초반에 제시한 뒤, 이 인용문을 축으로 글을 완성했다. 이처럼 논리의 축을 잘 세우면 글 쓰기도 쉬워지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선명해진다. 허혁 학생은 본론에서 등교거부가 지역이기주의의 볼모로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특히 초등학생들의 경우를 들어 등교거부가 기성세대에 의해 강요될 수 있음을 지적한 점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과연 부안의 등교거부를 학생을 볼모로 한 집단이기주의로 진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찾기 어렵다. 등교거부의 맥락을 생략하고, 모든 등교거부를 집단이기주의로 전제한 것은 글의 설득력을 훼손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문장이 중문, 복문으로 연결돼 핵심 전달을 방해한다. 가능한 한 짧은 문장으로 긴장감 있는 구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산 영덕고 정김주영 학생의 글은 등교거부를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에 비유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학생들의 등교거부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학생들의 주도 여부에 따라 등교거부의 성격을 나누어 비판한 부분도 좋았다. 그러나 적절한 비유와 풍부한 예에도 불구하고 논리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 노조의 단체행동권처럼 등교거부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인지, 학생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기성세대(학부모)에 의한 등교거부를 막아야 한다는 입장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학생들의 권리로 등교거부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기성세대에 의해 등교거부가 남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란 것은 짐작된다. 그러나 논리의 뼈대가 흔들려 글을 읽고 난 뒤에도 논리가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은 역시 ‘강요된’ 등교거부는 옳지 않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전해준 학생의 글은 항상 좋은 문장과 풍부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가끔 논리를 위해 지식을 인용하는 것을 넘어, 지식의 나열에 빠져 논리를 잃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이번 글도 초반부에 부안사태의 경과에 대한 서술이 너무 길었고, 본론 부분에서도 핵발전 찬반 논쟁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이런 부분은 출제자가 제시한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족이다. 그 결과 출제자가 제시한 글의 길이보다 훨씬 긴 글이 돼버렸다. 분량을 지키는 것도 채점의 중요한 기준이다. 때때로 과감한 생략이 논리구조를 빛나게 한다. 문제가 문제였을까. ‘등교거부는 정당한가’를 주제로 한 이번 논술에는 예컨대 ‘고정 기고자’들 위주로 글을 보내왔다. 등교거부 문제를 출제한 이유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이 문제의 갈등구조가 까다로워서인지, 찬반이 나눠질 만큼 논란이 뜨겁지 않아서였는지 글을 보내온 학생 수가 예상보다 적었다. 보내온 글 역시 한결같이 등교거부를 학생인권 침해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아쉬웠다.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교육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인격을 수양하고 지식을 쌓아야 하는 의무임과 동시에 그들이 평등하게 배울 수 있는 권리다. 이런 의무와 권리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역사 저편에 있는 수많은 조상들과 선배들이 교육의 불평등 앞에서 일구어낸 땀과 눈물의 소산물이다. 이런 소중한 의무와 권리를 어떤 이유이든 간에 집단이익을 위한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하다. 또한 부모들이 그런 집단이익을 위해 자녀를 볼모로 이용하는 것은 참된 민주주의 의사표현 과정이 아니다. 특히 집단 등교거부 학생들에는 상당수 초등학생도 포함되어 있는데 아직 가치판단의 기준이 올바르게 확립되지 않은 그들에게 부모라는 특권으로 자신들의 투쟁활동에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의 사회성 확립에 있어서 자녀 개인만의 손해가 아니라 이 사회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자녀의 개개인만 보더라도 이미 타 지역 학생들보다 많이 뒤처지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만큼 학업을 보충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많은 문제점이 산재하게 된 원인은 위에서 니부어가 말했던 집단이익에 의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러한 일이 이곳저곳에서 반복될수록 그만큼 피해는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미치게 된다. 여러 학자들은 이러한 윤리적 문제를 사회제도의 개선에 의해서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정부가 이제껏 보여왔던 안이한 정책수립 과정과 태도에 대해서 성찰하게 되고 피해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는 말이다. 분명 학생들이 자신의 고장을 위해 시위나 집회에 참가한다는 것도 다른 면에서는 산 교육임과 동시에 민주사회가 한층 성숙되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한 채, 자신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반쪽짜리 투쟁은 결코 좋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옛말에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교육은 국가적·민족적으로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교육을 볼모로 잡는 일은 사라졌으면 한다. 그들이 자신의 고장을 위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등교거부라는 단 한 가지뿐일 리는 없다. 학생들 자신이 좀더 성숙된 의식을 갖고, 부모님들은 자녀와 또 사회를 위해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그런 민주사회의 한 투쟁방식이 정착했으면 좋겠다.
[ 칭찬과 아쉬움 ] 이번주 예컨대 논술글로는 허혁 학생의 글이 뽑혔다. 허혁 학생의 글은 주제 집중력이 좋고 논리 전개가 선명해 눈길을 끌었다. 돋보이는 주제 집중력은 무엇보다 적절한 인용에서 나왔다. 허혁 학생은 니부어의 “개인적으로 도덕적이라도 자기가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말을 논술글 초반에 제시한 뒤, 이 인용문을 축으로 글을 완성했다. 이처럼 논리의 축을 잘 세우면 글 쓰기도 쉬워지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선명해진다. 허혁 학생은 본론에서 등교거부가 지역이기주의의 볼모로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특히 초등학생들의 경우를 들어 등교거부가 기성세대에 의해 강요될 수 있음을 지적한 점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과연 부안의 등교거부를 학생을 볼모로 한 집단이기주의로 진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찾기 어렵다. 등교거부의 맥락을 생략하고, 모든 등교거부를 집단이기주의로 전제한 것은 글의 설득력을 훼손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문장이 중문, 복문으로 연결돼 핵심 전달을 방해한다. 가능한 한 짧은 문장으로 긴장감 있는 구성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부산 영덕고 정김주영 학생의 글은 등교거부를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에 비유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학생들의 등교거부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학생들의 주도 여부에 따라 등교거부의 성격을 나누어 비판한 부분도 좋았다. 그러나 적절한 비유와 풍부한 예에도 불구하고 논리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 노조의 단체행동권처럼 등교거부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인지, 학생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기성세대(학부모)에 의한 등교거부를 막아야 한다는 입장인지 불분명하다. 물론 학생들의 권리로 등교거부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기성세대에 의해 등교거부가 남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란 것은 짐작된다. 그러나 논리의 뼈대가 흔들려 글을 읽고 난 뒤에도 논리가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은 역시 ‘강요된’ 등교거부는 옳지 않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전해준 학생의 글은 항상 좋은 문장과 풍부한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가끔 논리를 위해 지식을 인용하는 것을 넘어, 지식의 나열에 빠져 논리를 잃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이번 글도 초반부에 부안사태의 경과에 대한 서술이 너무 길었고, 본론 부분에서도 핵발전 찬반 논쟁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졌다. 이런 부분은 출제자가 제시한 문제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족이다. 그 결과 출제자가 제시한 글의 길이보다 훨씬 긴 글이 돼버렸다. 분량을 지키는 것도 채점의 중요한 기준이다. 때때로 과감한 생략이 논리구조를 빛나게 한다. 문제가 문제였을까. ‘등교거부는 정당한가’를 주제로 한 이번 논술에는 예컨대 ‘고정 기고자’들 위주로 글을 보내왔다. 등교거부 문제를 출제한 이유는 학생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러나 이 문제의 갈등구조가 까다로워서인지, 찬반이 나눠질 만큼 논란이 뜨겁지 않아서였는지 글을 보내온 학생 수가 예상보다 적었다. 보내온 글 역시 한결같이 등교거부를 학생인권 침해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아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