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미술과 프리다 칼로]
프리다는 보티첼리를 존경했지만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비너스와는 달랐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10대 후반의 프리다 칼로는 당시 남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보티첼리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파도의 물거품에 씻긴 말간 몸매를 수줍은 듯 태어나는 보티첼리의 금발의 비너스는 프리다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리다의 <나의 탄생>(1932년)은 ‘예술가 비너스’로서의 고통스러운 탄생의 기록이다.
1925년 18살 때 전차사고를 당한 프리다는 “누워 있기 너무나 심심해” 석고붕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폐부를 찢는 듯한 고통과 자신이 무가치한 장애인으로 살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견뎌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프리다는 그림 속에서 시련을 견뎌내는 강인하면서도 우아한 자화상을 표현해냈다. 하지만 진주조개 속에서 우아하게 태어나는 비너스가 아니라, 진통과 피범벅 속에서 비롯된 출산이었다. <나의 탄생>은 자신의 자궁 속에서 자라난 ‘자아’가 나의 질을 뚫고 태어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프리다는 평생 스스로를 예술의 소재로 삼았다. “나를 그린 것은 혼자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언제나 별 생각 없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그린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러나 프리다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동시에 그의 섬세한 화폭에 등장하는 ‘프리다’는 20세기의 가장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이미지였다.
서양에서 여성이 미술의 세계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은 멀리는 17세기 이탈리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 오라치오의 재능을 물려받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년)는 여성적 범주로 널리 다뤄지던 초상화·정물화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이스라엘의 여성 영웅 유딧을 그리며 재능을 빛냈다. 아르테미시아의 재능과 씩씩함을 물려받았으되, 프리다 칼로는 영웅적인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대신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페미니즘 미술의 씨앗을 뿌렸다. 일생 동안 32번의 외과수술을 받은 프리다는 200여점의 그림 속에 다양한 고통의 표정을 간직한 자화상을 담아냈다.
1970년대 중반 일어난 페미니즘 미술운동은 이 위대한 작가를 발굴·복원해냈다. ‘후배’ 여성 미술인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창작의 원동력을 길러낸 멕시코인 고유의 낙천성과 그 속에 깃들여진 자아의 어두움을 극적으로 표현해낸 프리다에 열광했다.
프리다의 작업은 페미니즘 미술사의 전개뿐 아니라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발전사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미술평론가 오혜주씨는 “프리다가 그림 속에 자신을 담아내는 방식이 미학적인 완성도를 얻기까지는 멕시코 미술의 발전이 뒷받침됐다”고 말한다.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해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1883~1949년),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8~1974년) 등 ‘멕시코 벽화운동 삼총사’는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멕시코 스타일의 민중미술을 일궈냈다. 스페인의 통치 이전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동경과 탐구는, 민중의 힘에 대한 신뢰와 개혁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멕시코 원주민 의상을 입은 꿋꿋한 프리다의 이미지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토착 의상을 즐겨 입은 프리다는 대지와 가깝고 더욱 관능적이고 더욱 진실하며 고통에 착취받는 삶과 인생의 의미를 간파한 여인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루통은 프리다의 예술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리다의 그림은 시간이나 공간에서 정확하게 그 시기의 멕시코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호소력을 주기 위해서, 가장 순수한 것과 가장 파괴적인 요소를 차례로 섞어놓은 그녀의 그림 세계는 오로지 여성에 국한된 것임을 나는 덧붙인다. 그녀의 예술은 폭탄에 묶여 있는 리본과도 같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프리다의 작업은 페미니즘 미술사의 전개뿐 아니라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발전사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미술평론가 오혜주씨는 “프리다가 그림 속에 자신을 담아내는 방식이 미학적인 완성도를 얻기까지는 멕시코 미술의 발전이 뒷받침됐다”고 말한다. 디에고 리베라를 비롯해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1883~1949년),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1898~1974년) 등 ‘멕시코 벽화운동 삼총사’는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멕시코 스타일의 민중미술을 일궈냈다. 스페인의 통치 이전 원주민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동경과 탐구는, 민중의 힘에 대한 신뢰와 개혁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멕시코 원주민 의상을 입은 꿋꿋한 프리다의 이미지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토착 의상을 즐겨 입은 프리다는 대지와 가깝고 더욱 관능적이고 더욱 진실하며 고통에 착취받는 삶과 인생의 의미를 간파한 여인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루통은 프리다의 예술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리다의 그림은 시간이나 공간에서 정확하게 그 시기의 멕시코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호소력을 주기 위해서, 가장 순수한 것과 가장 파괴적인 요소를 차례로 섞어놓은 그녀의 그림 세계는 오로지 여성에 국한된 것임을 나는 덧붙인다. 그녀의 예술은 폭탄에 묶여 있는 리본과도 같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