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가난과 싸워야 했던 ‘비싼’ 화가 이중섭… 아내와 주고 받은 절절한 애정의 편지
“화공 대향은 실로 귀여운 남덕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해야만 남덕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향의 애정이 가득 넘칠는지 지금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오. 나의 품안에 포옥 안기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단 한 사람인 나의 아내여, 안심하고 나를 믿고 기다려주오.”
“당신의 힘찬 애정을 전신에 느껴, 남덕은 마냥 기뻐서 가슴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는 나는 온 세계의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곧 편지하겠습니다. 하루빨리 오게끔 서둘러 주세요. 밤에는 당신의 사진을 안고 자겠습니다.”
현해탄을 뛰어넘은 사랑
대향(大鄕) 이중섭(1916∼56). 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남겼고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하지만 살아 생전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숨진 뒤에야 화단의 신화가 된 화가. 그는 세 가지로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화가로서 한국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그림값이 호(엽서 한장 크기)당 1억원을 넘겼다. 동시에 그는 시인 구상씨와의 우정으로 유명하다. 마치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돈독했던 우정처럼 이들 두 사람의 우정 역시 많은 일화로 전해질 만큼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그에게 따라붙는 또다른 이야기는 바로 일본인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과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이다.
일본 문화학원 미술과 유학 시절 만난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에 피지배국 남자와 지배국 여자의 사랑, 그리고 장래가 불확실한 ‘환쟁이’와 미쓰이그룹 계열사 사장 딸의 결혼은 시작부터 쉽지 않은 길이었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부인과 45년 가족을 꾸린 대향은 두 아들을 낳았지만 한국전쟁과 가난이 이들을 갈라놨다. 장인이 세상을 떠나 부인 이남덕씨가 유산문제를 정리해야 되는데다 전쟁통에 영양실조에 걸린 두 아들의 건강을 위해 아내와 아들이 1953년 일본으로 떠난 것이다. 그뒤로 부인 이남덕씨는 일본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며 버텼고, 남편은 한국에 남아 혼자 생계를 꾸리며 그림을 그린다. 돈만 조금 모이면 바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렇게 4년을 보내야 했다.
이들 부부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애절한 사랑을 전했던 편지가 최근 한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됐다. 1953년부터 55년까지 대향이 일본의 부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다빈치 펴냄, 9천원)이다. 화가 이중섭에 대한 책은 여럿 있었지만, 화가이기 이전의 인간 이중섭의 면모를 알려주는 책은 사실 그동안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가 직접 쓴 편지를 통해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 그리고 인간적 좌절과 고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향은 오로지 부인과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절절히 읊는다. 부인의 발을 무척이나 사랑해 부인을 ‘발가락군’이라고 부르고, “두 아들에게 뽀뽀를 전해달라”고 몇번이나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반면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끼 먹는 날과 요행 두끼 먹는 날을 보낸다”거나 “불을 땔 수 없는 사방 아홉자의 냉방에서 개털 외투를 입은 채 매일밤 새우잠을 잔다”는 구절은 그가 얼마나 가난에 억눌렸는지, 그래서 더욱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 삼아 예술혼을 담금질하며 그림의 외길을 정진한다.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다만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라는 독백은 그의 그림에 담겨진 힘과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고없는 주검으로 사라지다
(사진/부인 이남덕씨와의 결혼식(1945년) 사진(맨위).(K시인의 가족) 가족과 떨어져 있던 이중섭 화백이 55년 친구인 구상 시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린 작품. 대향 자신이 오른쪽에 혼자 떨어져 앉아 구 시인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어 당시 그의 외로운 심정을 읽을 수 있다)책의 초반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충만하던 편지의 내용은 후반으로 갈수록 힘들고 어려운 삶의 고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궁핍함과 좌절감에 점차 정신분열증세가 심해지는 것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대향의 기력이 쇠잔해지는 것도 느껴진다. 대향은 55년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호평을 받았지만 경제적 사정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고, 그나마 팔았던 그림값조차 떼이고 만다. 당연히 부인의 편지는 더욱더 유일한 희망이자 의지가 됐고, 대향은 오로지 편지만을 기다리며 부인에게 답장을 더 자주 보내달라고 투정하듯 애원한다. 편지에는 밝히지 않았지만 56년 가을 영양부족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한 뒤 대향은 “당신과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 보낼 생각이오. 기대하고 기다려주시오…. 그럼 건강한 소식 기다리오”라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낸 뒤 텅 빈 병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꼭 마흔살이었을 때다. 사흘 뒤 친구들이 병실을 찾았을 때 주검은 무연고자로 방치돼 있었고, 시트에는 밀린 병원비 계산서가 붙어 있었다. 잠깐 생계를 부칠 요량으로 헤어졌던 부부는 그렇게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사실 사람들은 예술가의 작품만을 지켜볼 뿐이다. 그림의 느낌과 매력에는 쉽게 취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절절한 사연과 그런 고통이 어떻게 화폭에서 승화됐는지는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다. 대향의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대부분은 그렇다. 그가 유달리 어린 아이들과 가족의 모습을 많이 그렸던 까닭은 바로 생이별한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이 책은 그림은 미처 들려주지 못하는 그런 뒷이야기들을 전해주며 대향의 예술세계를 더욱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이제는 감각적이고 톡톡 튀지만 대신 또한 쉽게 휘발되버리고 마는 요즘의 사랑 언어 대신 이젠 잊혀져가는 진지하고 솔직한 이전 세대의 사랑 언어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마치 흑백영화의 대사처럼 요즘 보기에는 어색하고 낯간지러워 보이지만 반세기 전 이들 부부의 사랑은 요즘의 염량세태 속에서 더욱 신선하고 더욱 애닯다.
원래 이 책은 지난 80년대 초반 박재삼 시인이 일본어로 주고받은 편지를 번역해 1천부가량 출판됐다. 그러나 워낙 적게 찍어 시중에는 거의 유통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거의 20년이 흐른 최근 다시 출간됐다. 대신 당시에는 없었던 풍성한 도록이 덧붙여져 그가 편지에 썼던 그리움이 그림 속에서 어떻게 승화됐는지를 볼 수가 있게 됐다. 올해 초 나온 미술평론가 오광수씨의 <이중섭>(시공사 펴냄, 1만2천원)이 화가로서의 이중섭을 알려주는 책이라면, 이 책은 자연인으로서의 이중섭을 이중섭 본인이 육성으로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중섭 신화에 가려져 있는 그의 진면목을 전한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사진/이중섭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색연필로 정성껏 그림을 그려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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