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원이 말하는 ‘나의 스타 백건우’… 피아노의 구도자를 향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
몇달 전 김원씨를 만났더니 “출판기념회에 온 건축계 후배들이 나보고 글발이 건축발보다 낫다더군요” 하면서 글모음집을 건네주었다. 주업인 설계보다 부업 또는 취미생활이 더 앞선다는, 애매모호한 칭찬 앞에서 하하하 웃던 그는 요즘 아예 글발이 건축발보다 앞서는 사람들의 모임인 ‘발발이 모임’이라는 비밀 사조직에 가담하고야 말았다. 김원씨의 글발에 대해서는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데, 그 글발을 키운 것 중 8할은 아마도 세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일 것이다. 집짓는 일말고도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안테나를 올려대기에, 그는 발발이 모임을 비롯해 크고 작은 공식·비공식 모임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그 중 김원씨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모임이 있으니 가칭 ‘백건우 팬클럽’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백건우 팬클럽’ 회원
몇년 전 뜻맞는 이들과 함께 팬클럽 회원이 된 그는 백건우씨가 내한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열일 제치고 달려가곤 했다. 기회가 닿을 때는 일본·프랑스에서 열리는 연주회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8월엔 백건우씨가 8년째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프랑스 디나르 페스티벌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번 10월23·25일 ‘백건우 프로코피예프 전작 연주회’(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02-2005-0114)를 앞두고 골수팬인 김원씨 역시 기대에 부풀어 있다. 고등학교 때 미술수업을 받았던 ‘권진규 선생님’말고는 이처럼 누군가를 ‘예술가’로서 아끼고 사랑해본 일이 없다는 김원씨가 백건우씨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았다.
내가 ‘백건우’라는 이름을 귀에 담았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죠. 고향이 부산이라 경기중학교를 다니려면 서울에서 하숙을 해야 했어요. 같은 하숙집에 배재중학교 다니던 후배가 있었는데 그 애가 어느 날 “우리 반에 백건우라는 애가 있는데요, 걔만 머리를 빡빡 깎지 않아도 된다고 학교에서 특별히 허락해줬어요”라며 부러워하더군요. 나도 어린 맘에 ‘유명해지면 그런 특별대우를 받는구나’ 하면서 은근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김원씨보다 3년 늦은,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건우씨는 교회 오르간 반주자였던 어머니와 클래식음악 마니아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8살 때부터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배운 지 2년 만인 10살 때 첫 번째 독주회를 열었고, 12살 때는 국립교향악단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 ‘큰 재목’임을 확인시켰다. 배재중학교를 졸업한 뒤 15살 되던 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로지나 레빈을 사사한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두각을 나타냈던 머리 긴 소년 백건우는 아마 당시 까까중머리 또래 소년들에게는 딴 세상 아이 같았을 것이다.
예술가의 소박한 생활에 깊은 감명
그 뒤 백건우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년 전쯤 국립현대미술관 후원기구인 현대미술관회 활동을 하던 때였습니다. 현재 현대미술관회 회장인 김영호(일신방직 사장)씨가 ‘백건우를 좀 도와주자’며 동을 떴지요. 백건우씨가 원체 숫기가 없는 사람인지라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해요. 한국에 오면 연습할 곳도 없고, 자연히 연습할 피아노도 없지요. 예술가연하고 남한테 좀 재고 그래야 승용차도 내주고 대접을 할 텐데 백건우·윤정희 부부는 아무 말 없이 늘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고 다녔어요. 프랑스에서도 자가용 없이 늘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그래요. 그런 얘기를 듣고 김영호 회장이 연습실을 내주고 자기 집도 빌려주고 하니까 현대미술관회 회원들이 하나둘씩 관심을 갖게 됐지요. 우린 후원회라기보다는 팬클럽에 가까워요. 10~12명가량 되는 50~60대 아줌마·아저씨들이 마치 소녀팬들처럼 백건우를 스토킹하며 연주회장마다 몰려다니지요. 연주 끝나면 누구보다 벌떡 일어나서 기립박수 치며 분위기 띄우고 무대 뒤까지 따라가 축하해주고 하면서. 백건우·윤정희 부부도 그런 열기 띤 환호에 무척 고마워했어요. 내가 백건우씨를 맘속으로 정말 좋아하게 된 것은 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였어요. 유명인답지 않게 어찌나 겸손하고 소박하던지. 말을 아끼는 건지, 부끄럼을 타는 건지 쭈뼛쭈뼛하며 아주 어렵게 한마디씩 하곤 했지요. 예술가라고 하면 자의식에 가득 차고 자부심이 넘치는 고집 센 사람을 떠올렸는데, 그를 보면서 역시 예술의 높은 경지라든가 고뇌를 이해하는 사람은 백건우 같을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게다가 또 윤정희씨는 얼마나 유명한 배우였어요 흔히들 한번 화려한 생활을 경험했던 사람은 평생 그 세월을 잊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윤정희씨는 달랐어요. 스크린의 꽃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여자가 한 남자의 예술을 위해 손에 물 묻히며 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도 소박한 생활을 감내하는 걸 보면 멋진 로맨스라는 생각이 들어요.
흔히들 백건우씨를 ‘피아노의 구도자’라고 합니다. 몇년간 그를 지켜보니 말로만 아니라 정말 그랬어요. 매번 연주회 레퍼토리만 봐도 그 노력의 편린을 짐작할 수 있지 않아요. 걸핏하면 초연, 걸핏하면 전곡 연주, 걸핏하면 듣도 보도 못한 난곡들에 도전해왔으니 그 연습량이 얼마나 엄청나요?
백건우는 본래 한 작곡가의 곡을 천착하는 연주자로 이름 높다. 그가 처음 세계 무대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은 1972년 뉴욕 앨리스 투리 홀에서 라벨의 독주곡 전곡을 연주하면서부터였다. 성공적인 라벨 연주를 통해 라벨 전문가의 위치를 확고히 한 뒤에도 백건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 다음 과제는 무소르그스키였다. 70년대 후반 그는 <전람회의 그림> 외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무소로그스키의 피아노곡 전곡을 녹음하는 데 정열을 쏟았다. 그 즈음 영화배우 윤정희씨와 결혼해 파리에 정착했는데, 피아노 레슨 등으로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도 피아노 연습과 연주회 수입에만 의지했다고 한다. 80년대 초반에는 리스트 피아노곡을 탐구했고, 이어 스크리아빈·드뷔시·사티·풀랑 등의 난곡을 녹음했다. 90년대 들어 그는 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 등에 매달렸고 93년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해 프랑스 디아파종상을 수상했다.
도쿄·파리 연주회에 팬클럽이 가기도
백건우씨는 8년째 프랑스 디나르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아왔어요. 올해 14돌을 맞은 디나르 페스티벌은 프랑스 북부 조그만 항구마을, 디나르시가 매년 여름 고성이나 귀족의 정원 같은 야외 공간에서 음악회를 주최하는 행사지요. 주민들은 풀밭에 낚시의자 같은 것을 갖다놓고 청바지 차림으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기지요. 백건우씨가 올해 8월 페스티벌에 초대하면서 “그동안 고생고생하면서 8년 동안 키워왔는데 이제는 좀 와서 보셔도 창피하지 않겠다”고 해서 팬클럽 몇몇 분들과 갔었지요. 페스티벌 마지막 날 백건우씨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데, 굉장했어요. 그 시골마을에 3천명이 넘게 몰려왔으니까요. 연주도 훌륭했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어요. 그래서 “이 정도면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알려도 되겠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보면 좋지 않겠느냐” 했더니 백건우씨가 빙긋이 웃으면서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한국 사람들이 꼭 많이 오란 법 있느냐. 나는 이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다”고 해요. 그때 또 한번 ‘백건우답다’는 걸 확인했지요. 내가 알기론 백건우씨 음반 재킷 사진의 대부분을 윤정희씨가 찍어요. 매니저도 따로 두지 않고 윤정희씨가 홍보하고 스케줄 잡지요. 백건우씨 정도의 음악가라면 당연히 유대인이 운영하는 기획사 같은 곳을 잡아 국제적인 마케팅을 펼칠 법한데, 이 부부는 도통 그런 걸 안 해요. 백건우씨를 보면 ‘내가 무슨 상품이냐’ 하는 자의식이 있어 보여요.
백건우는 난해하고 무거운 작곡가들에 집중할 뿐 아니라 연주 자체도 기교의 과시나 대중적인 연주 스타일 대신 본인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해석을 중시해왔다. 음악평론가 김재용씨는 “피아노 음색의 미감에 집중한다기보다는 툭툭 던지는 듯한 건조하고 날카로운 음색을 들려주었으며 따뜻하고 섬세한 연주보다는 차갑고 투명한 연주를, 빠르고 긴박한 템포보다는 탄탄한 리듬감과 강인한 타법으로 곡의 긴장감을 확보한다”고 평한다. 그래서 미국의 한 음악평론가는 백건우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전한다. “어떤 음악가는 청중을 향해 연주하고, 다른 어떤 이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전지전능한 뮤즈를 향해서 연주한다. 백건우는 분명히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피아니스트다.“
백건우의 뮤즈를 향한 연주를 들어보라
나는 백건우의 음반 중 포레의 로만스(2001년, 데카)를 특히 좋아하지요. 그의 음반을 열댓장 정도 가지고 있는데, 백건우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요. 이번 연주회에서도 백건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귀를 쫑긋 세울 걸 생각하니 설레는군요.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건축가 김원씨가 ‘나의 스타 백건우’를 말한다. 백건우 팬클럽 회원인 김씨는 파리와 일본을 오가며 성원을 아끼지 않는다. 피아노의 구도자를 향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을 엿본다. |

▷ 건축가 김원씨는 광장 건축환경연구소 소장으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서울관구·피정센터·도서관 개축, 서울 남산갤러리 빙, 광주 가톨릭대학, 국립국악원, 통일연수원 등을 설계했다.
내가 ‘백건우’라는 이름을 귀에 담았던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죠. 고향이 부산이라 경기중학교를 다니려면 서울에서 하숙을 해야 했어요. 같은 하숙집에 배재중학교 다니던 후배가 있었는데 그 애가 어느 날 “우리 반에 백건우라는 애가 있는데요, 걔만 머리를 빡빡 깎지 않아도 된다고 학교에서 특별히 허락해줬어요”라며 부러워하더군요. 나도 어린 맘에 ‘유명해지면 그런 특별대우를 받는구나’ 하면서 은근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는 무겁고 난해한 곡을 투명하고 강인한 타법으로 연주한다.

사진/ “우리의 스타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간다.” 김원씨(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를 비롯한 팬클럽 회원들이 백건우씨의 2001년 일본 연주회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