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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닿을 듯 말 듯한 당신, 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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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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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독서가들이 추천하는 독서법… “읽더라도 알고 읽자”

(사진/책을 고를 때는 추천도서 목록도 유용하지만 직접 서점에 가서 들춰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립대학의 국어국문과 교수 김아무개씨는 최근 격세지감을 느껴야 했다. 수업중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아느냐고 묻자 문과대에 들어온 대학 1학년생 중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암기식 교육 속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주입받다보니 사회 전체적으로 독서를 권하지 않는다며 그 교수는 개탄했다. 학창 시절엔 입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성인이 된 지금은 스스로 독서를 선택할 수 있다. 영상매체와는 달리, 읽으면서 차분히 상상할 수 있고 자기 스스로 정보 주입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인류의 오랜 발명품, 책. 그렇지만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 요리에 조리법이 있고 등산에도 요령이 있듯이 모든 일에는 방법론이 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책을 손에 잡기부터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하기까지, 각계의 독서가들이 추천하는 방법론을 알아보았다.

가지치기식과 잡독법, 바른 선택을 위해

아예 책에 대한 공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숭문고 국어교사인 허병두씨는 일단 서점에 가볼 것을 권유한다. 책의 홍수와 만나고, 책을 읽는 사람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솟는다는 것이다. 대형서점은 볼 것도 많고 진열된 책도 많아서 폭넓은 책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헌책방이나 작은 골목 서점은 시끄러운 사람들을 피해 오붓하게 서서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재계의 독서가로 알려진 SK 손길승 회장 역시 책과 일단 접촉할 것을 권유하는 사람 중 하나다. 바쁜 시간에 책읽는 요령으로 손 회장은 자동차 안에 책을 비치할 것을 권한다. 손이 닿는 곳에 책이 있으면 몇쪽이라도 읽게 되고, 일하는 자투리 시간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 회장의 차에는 요즘 <세계화 이후의 세계화>(로웰 브라이언)를 비롯한 여남은권의 책이 실려 있다.

일단 책을 접하기 시작했으면 책을 골라야 한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많지만 크게 가지치기식과 잡독식으로 나눌 수 있다. 가지치기식은 한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 관련된 다른 분야를 읽고 하는 식이다. 정계의 독서가로 알려진 손세일 전 원내총무의 독서법은 가지치기식이다. “관심이 생기면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섭렵하는 겁니다. 한 분야를 집중해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연관된 분야로 관심이 옮겨갑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아시아근대사에 대한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책을 모아 국회 ‘손세일 서고’에 2천권을 기증하고 남은 책이 1만5천권 남짓이라고 한다.

고서(古書)수집으로 유명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반대되는 책 선정법을 갖고 있다. 손에 닿는 대로 읽는 잡독법이다. 이 방법은 뜻하지 않게 좋은 책과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젊을 땐 역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야지요. 나는 아직까지도 잡독입니다, 잡독.” 고등학교 때 토머스 울프며 오스카 와일드를 원문으로 읽었는데, 그때 읽은 책 중에는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도 있다며 뿌듯하게 자신만의 독서역사를 회상한다. 언뜻 질서없어 보일지라도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책을 골라나가면, 그것이 곧 자기의 독서흐름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책에 따라 마라톤형과 산책형을 병행하라

(사진/일단 무조건 서점에 가보는 것도 훌륭한 시작이다.독서하는 많은 사람들속에 섞여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지적욕구가 생긴다)
추천도서목록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 대형서점, 신문 등의 추천도서목록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책 고르기에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인터넷사이트를 검색하면 간단히 추천도서목록을 얻을 수 있다. 언론매체에 서평이 실린 책들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이 서점을 방문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믿을 만한 방법이지만, 추천도서목록은 책 고르는 시간을 많이 줄여준다. 책을 많이 읽은 일반인이 개인적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기만의 추천도서목록을 올리기도 한다. 책읽는 남자 대갈장군 홈페이지(http://myhome.netsgo.com/jbob), 표정훈의 책읽기(http://members.tripod.lycos.co.kr/john1214/)가 그런 곳이다. 이런 사이트에는 책을 놓고 왜 좋은가 토론하는 게시판도 있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면서 책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유용하다.

독서법 역시 “그냥 책을 손에 쥐고 읽으면 되는 거 아냐?” 싶지만 사실 책읽는 법은 여러 가지다. 소리내어 읽기, 밑줄치며 읽기, 동사에 주목하며 읽기, 심상(心象)에 주목하며 읽기…. 현재까지 알려진 독서법은 150개 이상이라고 한다. 김열규 교수는 독서법을 책에 맞게 달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는 마라톤형 책이 있고 산책형 책이 있습니다. 마라톤형은 젊은 시절이면 누구나 흠뻑 빠져서 밤을 꼴딱 새우는 그런 책이지요. 스탕달의 <적과 흑>이라든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든가. 그런 책을 읽고 있으면 확 빠져들어가서 마지막장을 넘길 때까지 잠도 안 자고 독서에 몰두하게 되지 않습니까? 반면에 한쪽 읽고 덮고 생각해보고, 한쪽 읽고 덮고 해야 할 책이 있습니다. 산책형 책입니다. 산책형 책에는 파스칼의 <팡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경구집이나 단상집이 들어갑니다. 한번에 서너줄을 읽더라도 많이 생각해봐야 하는 책입니다. 불과 서너줄이라도 깊은 함축성이 있습니다.” 김 교수는 독서력이 얕을 때는 마라톤형 책을 읽어 흥미를 키우고, 어느 정도 집중력이 쌓이면 산책형을 읽으면서 묵상할 것을 권한다. 그는 또 진지하게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가 왜 사는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삶의 고민이 생기게 마련이며, 그런 고민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책읽기를 유도한다고 덧붙였다.

책읽기도 창조적으로

(사진/손닿는 곳에 책을 두다보면 짬짬이 읽게 된다. 화장실,자동차,부엌 어디라도 좋다)
문학평론가 정과리씨는 정공법적인 책읽기를 권한다. 고전은 외운다, 좋은 구절은 베껴쓴다,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되풀이 해 읽는다. 이 세 가지가 그것이다. “고전을 외운 다음에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잊어버려도 그 나름대로 밑거름이 됩니다. 좋은 구절을 베껴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두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번 읽을 가치도 없다’는 말처럼, 좋은 책을 두번 읽는 것이 그저 그런 책 두권을 한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직장인 같은 경우 책을 접한 경험이 적다면 관심분야부터 읽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정씨는 덧붙인다.

한편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제시하는 책읽는 법은 조금 다르다. “책을 읽을 때 두 가지를 염두에 둡니다. 첫째는 책을 유의미한 해석의 지평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즉 이 책이 어떤 맥락에서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죠. 둘째는 책의 언저리 사항, 그러니까 문화나 역사나 사회배경을 염두에 두고 전체를 조망합니다. 이렇게 하면 책에 대한 해석이 풍부해집니다.” 진씨는 즐기기 위한 책을 읽을 때는 잡독을, 어떤 분야의 지식을 얻으려는 목적을 갖고 책을 읽을 때는 서지목록을 뽑아서 탐독을 하는 두 가지 방법을 섞어쓴다. “학교 앞 리어카라든지 개가식 도서관, 화장실에 비치해놓은 잡지, 이런 우연한 책과의 만남을 즐깁니다. 그러면 생각지도 않았던 조합의 아이디어가 나오죠. 한 내용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는 겁니다.”

정과리씨가 말한 것은 텍스트에 충실하는 독서법이고, 진중권씨의 독법은 사회·역사적 맥락을 중요시하는 독서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어느 쪽도 버리기 어려운 방법이지만 책읽을 때 “텍스트에 집중을 못한다”라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을 훌훌 날려볼 필요도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몽상의 시학>에서, “텍스트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 생각을 따라 책을 읽어보라”고 말한다. 독서도 하나의 대화인 만큼 텍스트를 충실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에 자신의 사유를 불어넣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수천의 소우주

(사진/헌책방에서 절판된 책이나 희귀본을 싸게 만날 수 있는 의외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항적 독서’(resistant reading)를 시도하기도 한다. 순우리말로 ‘버티어 읽기’라고도 하는데, 텍스트에서 제시하는 바가 있으면 그와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렵게 들리지만 간단하게 시도해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렇게 주장한다 싶으면 왜 그런가, 과연 그런가를 자기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보는 것이다. 미국의 마르크시스트 프레데릭 제임스 역시 ‘징후적 책읽기’(sympton reading)라는 개념을 통해서 행간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텍스트에 있는 징후를 읽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을 단순한 수용과정이 아닌, 읽는 이의 세계관이 반영된 능동적 행위로 본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언론 뒤집어보기’ 붐도 이런 맥락의 독법으로 볼 수 있다. 징후적 책읽기든 버티어 읽기든, 모든 독법은 또다른 세계와 의사소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진 쿠퍼에 따르면, 책은 문화적으로 우주를 의미한다. 책이 존재하면서부터 인간은 지식을 집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다른 인간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책은 곧 현실세계와 이데아를 연결하는 창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에서 책의 페이지 하나하나는 만물로 은유되며, 이슬람교는 반대로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책으로 본다. 파란 창공이 우주로 열린 계절이다. 서고에서 지금 수천의 소우주가 잠들어 있다. 당신이 깨워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글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park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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