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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념보다 강한 ‘하얀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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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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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전후 격동기를 담은 <굿바이 레닌>… 유쾌한 코미디가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평범한 동독 청년 알렉스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에다가 애국자였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코마 상태에 빠진 동안 그 자신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때는 1989년, 20세기 최고의 역사적 사건인 베를린 장벽 철거와 동서독 통합의 프로세스가 시작된 해다. 장벽의 와해와 함께 동독 사회도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세계도 급격히 물갈이된다. 동독 상품들이 퇴출되고 회사들은 문을 닫으며 열렬한 사회주의자의 두 자녀도 결국 서독 자본주의의 상징인 햄버거 가게와 위성방송 회사에 취직한 형편이다. 집안 가재도구들과 패션이 바뀌고 심지어 아이 기저귀까지 바뀐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코마 상태에 빠진 그의 어머니뿐인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충격을 피하려는 처절한 몸부림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기적처럼 일어나고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애초에 베를린 장벽 철거를 요청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는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 어머니가 유사한 상황에 빠지면 생명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것. 그는 일단 대담하게도 타임머신을 돌리듯 어머니 침실의 모든 상황이라도 장벽 철거 이전으로 돌려놓고 모든 세상의 변화를 어머니에게 철저히 숨기기로 작심한다. 그의 눈물겹고 집요한 거짓말의 첫삽은 이런 식으로 떠진다.


흔히들 ‘정직이 최고의 방책이다’라고 말한다. 결국은 진실이 거짓보다 더 유익하다는 말에 대해서 일단은 모두가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나, 현실은 세상은 복잡하고 상황은 너무 우발적이다. ‘하얀 거짓말’은 괜히 등장한 조어가 아니다. 죽을 병 걸린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건 거의 초보 수준에 해당하고 이보다 더 애매한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정언명제와도 같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따위의 말들은 이미 고려 사항에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알렉스에게도 마찬가지다.

▷ <굿바이 레닌>은 동서독 통합의 격동기를 ‘가족’이라는 화두로 풀어나간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거짓말은 일단 시작되면 자가증식을 한다는 것. 그것을 멈추는 결단은 애초에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결단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도 불문가지다. 거짓말의 기둥과 문설주와 벽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복고풍 유행에서처럼 동독 시절 추억의 옛 제품들을 모으는 알렉스의 첫 노력은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침실의 창문에서조차 숨길 수 없는 코카콜라 광고판을 변명하기 위해 콜라가 동독의 발명품이었다는 TV 뉴스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이 거짓말의 집은 점점 더 블록버스터급으로 커지더니 급기야 서독이 와해되고 동독으로 흡수 통일되는 대안적 역사까지 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 모든 것을 둘러대고 있는 광경은 <아멜리에>의 음악 스코어를 썼던 얀 티에르센의 음악을 배경으로 애처롭도록 코믹하다.

영화의 재미는 우발적으로 시작한 이 거짓말의 성격이 점점 변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 있다.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 하얀 거짓말은 점차로 더 강도가 높아지고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은 고백의 수단을 택하려 한다. 아이에게 기저귀까지 강요하고 어머니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며 TV의 뉴스를 통제하는 모습의 알렉스는 점차 동독 지도자들의 모습과 닮아가기도 한다. 정말 어머니(국민)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나 주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몰래 바깥 세상을 넘겨다보기까지 한다.

‘가족’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본다

그러나 위태롭기만 한 이 거짓말의 집을 빈틈없이 견고하게 만들려는 불굴의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숭고미를 담고 있기까지 한다. 그것은 비루하고 부조리한 현실보다 거짓말로 지어진 이 집이 훨씬 더 이상적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중반 이후의 알렉스는 그 이상(理想)의 순수성을 수호하려는 순교자와 같이 보이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주장하는 시위에 섰던 그가 이젠 자신의 이상 혹은 어머니의 꿈꾸던 세계를 그의 거짓말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역사의 스케일로 거짓말을 한다는 점에서 <굿바이 레닌>은 얼핏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언더그라운드>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변화한 바깥 세상과는 무관하게 옛 생활을 이어가는 ‘거짓의 집’ 속 거주민들의 모습이 바깥과 묘한 대구를 이루면서 일으키는 역설, 아슬아슬한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또 다른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시켜갈 때 일어나는 유머도 그렇다. 또 엎치락뒤치락하는 소동 뒤로 은근히 내려앉는 비감한 정서도 유사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 비감함의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탐욕을 위해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는 <언더그라운드>의 거짓말은 계급과 정치적 풍자를 담은 직접적인 우화를 만든다. 언더그라운드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과 우스꽝스러운 정경이 역설적인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것이다. 반면 어머니를 살리려는 아들의 효심()으로 시작된 <굿바이 레닌>은 변화의 물결 이후 도태된 동독 사람들의 풍경을 두루 배치하면서 정치적 사건이 개인들에게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가만히 쳐다본다. 이것이 할리우드식이라면 ‘격동기에도 어김없이 피어나는 불타는 사랑’을 내세우겠지만 볼프강 베커 감독은 ‘가족’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알렉스가 어렸을 때 서독으로 망명한 아버지가 나타나고 아버지의 망명 이후 열혈 사회주의자로 돌변했던 어머니의 비밀과 그간 속내가 밝혀진다. 거짓말을 해왔던 것은 알렉스만이 아니었던 것. 돈을 서랍 밑에 숨겨 넣고 편지들을 찬장 뒤에 숨겨놓듯이 그녀의 진실은 그렇게 꽁꽁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장벽을 넘고 부수는 일보다 어려웠던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을 가면서 알렉스는 어릴 적 자신의 꿈이자 우상이었던 우주조종사를 만난다.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지지고…

일정한 거리에서 서로 잡아당기고 밀어내며 궤도를 도는 가족이라는 천체가 부각하고 알렉스의 거짓말도 독소를 털어낸다. 심지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스모크>의 경지, 이미 사실(fact)이냐 아니냐가 크게 상관없어진 그러한 경계에서 꿈꾸고 바라던 것, 잊었던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비추는 예술의 경지로 올라서는 것이다. 결혼식 비디오 촬영 편집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떠올리는 3류 영화광인 알렉스 친구의 마지막 편집본도 그렇게 해서 작품이 된다. 이것은 영화가 세상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은유이기도 하다.

2003년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유럽영화상을 수상한 <굿바이 레닌>은 무엇보다도 같은 분단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좀 다른 의미로 감상될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야외상영작이기도 했다.

김종연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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