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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스포츠맨십, 세이브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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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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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 위기 맞은 김병현은 우리 프로 스포츠의 ‘인성교육’ 현주소 되돌아봐야

김병현(24·보스턴 레드삭스)이 ‘손가락 하나를 잘못 놀리는 바람에’ 미국 프로야구 데뷔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김병현은 지난 10월5일(한국 시각)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 3차전에서 선수 소개 때 자신에게 야유를 보내는 홈팬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곧추세워 보이는 ‘무례한 행동’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김병현은 그 여파로 뉴욕 양키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을 뿐 아니라, 내년 시즌 트레이드설과 메이저리그 영구 추방설까지 나도는 등 미국 진출 5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또 일낼라.” ‘손가락 사건’ 이후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 앞서 장내 아나운서가 김병현을 소개한 뒤 양키스 팬들의 야유가 터지자, 김병현의 팀 동료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병현의 팔을 잡고 있다.(AP연합)

“미국 프로 스포츠 문화 제대로 이해해야”

‘김병현 사태’를 바라보는 국내 야구팬들의 시각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김병현의 행동을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경솔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비난하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김병현도 잘못했지만 보스턴팬들의 반응도 유색인종의 차별에 근거한 것으로 지나치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미국에서도 보수 성향이 강하기로 소문난 보스턴의 지역적 특성과 맞물려 ‘김병현 희생양론’으로 발전하고 있다. 보스턴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할 경우 지역 야구팬들과 언론에서 분출될 각종 비난이 김병현에게 집중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김병현은 보스턴 지역 언론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병현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기피하면서 시작된 ‘껄끄러운 관계’가 포스트시즌에 접어들면서 ‘적대적 관계’로 확장됐다. 보스턴 지역 언론들은 시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김병현이 마무리에 실패할 때마다 트레이드설까지 동원하며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언론의 태도는 지난 여름 보스턴으로 이적한 뒤 19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무려 16번이나 세이브를 따낸 김병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의 그 장면. 순간의 실수로 김병현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스포츠서울 제공)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 프로 스포츠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진출을 꿈꾸는 선수들은 ‘프로는 어떤 경우에라도 팬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프로 세계에서 도태된다는 사실을 터득해야 한다. 실제로 미국 프로야구는 경기장 안팎에서 팬을 모욕하는 행동을 한 선수는 가차없이 ‘퇴출’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1999년 인종차별 발언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마무리 투수 존 로커(당시 25살)다. 로커는 시즌이 끝난 뒤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영어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고 한국어, 스페인어 등만 들리는 뉴욕을 혐오한다”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로커는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곧 사과했으나, 다음 시즌 템파베이로 트레이드됐다가 결국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미국 프로야구는 메이저리그 진출 관문인 마이너리그부터 선수들에게 인성교육을 철저하게 시킨다. 각 팀들은 스포츠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를 팀 닥터로 배정해 주기적으로 선수들에게 스포츠맨십과 도덕성, 공인의 자세 등에 대해 교육시킨다.

반면, 국내 프로 스포츠는 선수들의 ‘인성교육’ 시스템이 전무한 실정이다. 특히 프로야구의 경우 그동안 팬들의 분노를 산 ‘사고’가 숱하게 발생했으나 그때마다 유야무야 넘어갔다. 지난해 9월 기아타이거즈의 김성한 감독은 훈련 도중 2군 선수를 방망이로 폭행해 머리에 여섯 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혀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김 감독은 구단의 적극적인 ‘비호’와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묵인’으로 사임 위기를 가볍게 넘겼고, 오히려 폭행을 당한 선수가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팬들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서도 버젓이 선수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부산아시아경기대회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된 삼성 포수 진갑용(29)은 도핑 테스트에서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밝혀지자, “후배가 대표팀에 선발돼 군 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내 소변에 금지 약물을 넣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진갑용은 자신의 해명이 도핑 기술진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나자, “지난 시즌부터 경기 출장이 많아지면서 체력에 부담을 느껴 근육강화제 등을 복용해왔다. 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면 대표팀에서 탈락할 것 같아 숨겨왔다”며 팬들에게 사과했다. 진갑용은 대표팀에서 탈락했으나 소속 팀에서는 방출당하지 않았다. 한 프로팀 감독은 “메이저리그였다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위가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번번이 일어난다”며 “선수들이 공인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할 경우 퇴출당하는 관행이 KBO에서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야무야.” 선수를 폭행해 물의를 빚었던 김성한 기아타이거즈 감독(왼쪽)과 약물복용을 숨겼다가 탄로난 진갑용 삼성 포수(오른쪽).(한겨레자료사진)

새 투수 찾는 보스턴

김병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보스턴이 내년 시즌에 새 마무리 투수를 구할 것이라는 설이 진작부터 나돌고 있기 때문에 김병현의 입지는 매우 좁다. 게다가 올 겨울에는 마무리 투수 시장마저 유난히 풍성하다. <스포츠위클리> 등 미국의 스포츠 전문지에 따르면 보스턴 구단은 올 시즌 아메리칸리그 구원왕 키이스 풀크(오클랜드)와 에디 구아르다도(미네소타), 우게스 어비나(플로리다) 등에 눈독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김병현의 트레이드는 거의 확실한 상황인데, ‘징계성’ 트레이드인 만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올 연봉 325만달러인 김병현은 보스턴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킨 뒤 내년 시즌 몸값을 500만달러로 높인다는 계획이었다.

허구연 문화방송 해설위원은 “한국에서도 그런 행위를 하면 관중들이 용납하지 않는데, 이방인에게 보수적인 것으로 소문난 보스턴에서 일을 저질러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그러나 김병현이 월드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쳐 팀을 우승시킨다면 모든 것이 다 묻힌다”고 말했다. 결국 김병현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실력뿐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면? 그 결과는 국내 야구팬으로서는 상상하기 싫은 모습이 될 것 같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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