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대 다닐 만큼의 길만 포도시(겨우) 남긴 마을회관 앞은 지산댁네 나락이 가을 아침 볕을 맞으며 누렇게 반짝인다. 논에서 베여져 마당이며, 하우스, 도로까지 넘쳐나온 나락에다 대고 ‘가을의 풍요로움이니, 결실의 계절이니’ 따위의 감상을 떠올리기 어렵다.
‘일자리 좀 알아봐달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여성농민회 친구에게 생각이 미치자 좋아하던 가을햇발마저 무겁다. 농업과 농민운동에 헌신적이던 친구 부부는 수박농사를 몇년간 크게 짓기도 하고 15년 동안 부지런히 몸 놀려 무, 배추, 고추 등의 농사를 지었지만 오히려 농사 터전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다.
올 초 농사를 줄이고 남편이 직장을 선택했을 때 마음은 오죽했겠냐 싶었는데 올 겨울엔 친구까지 나서야 한다는 말에 “그런데 농사는 어쩔란가?” 힘없는 대꾸나 할 수밖에 ….
대학 졸업 뒤 바로 영광에서 삶을 꾸린 친구 부부의 농업사랑을 알고 있지만 곧 농협에서 날아올 돈 갚으라 재촉하는 영수증과 독촉전화로 시달릴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쪽이 못내 서운하다.
얼마 전 홍농에서 농사짓는 후배는 “언니, 나 찻집 할라는데 마음이 편치 않네. 농업을 지켜야 하는데 나마저 딴 일 한다는 게 농업에 대한 배신인 것 같아서 미뤄왔는데 생활비도 못 건지는 농사지어서 아들놈 둘 키우겠는가?”
“동네 아짐들 서운해라 하겠다”는 말에 “긍께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네에 혼자 농사짓는 아짐들이 많아 우리 차로 장날 짐이라도 덜어드렸는디. 그래도 아짐들이 아무도 안 말리네. 농사지어선 못 산다고….”
어린 부녀회장이 듬직하게도 동네일 본다 싶었는데 그것도 마음먹은 대로 안 되나 보다. “난 농사짓는 게 천직인디, 참 재미지거든. 근디 지은 대로 빚이 되니 살 수가 있어야지.” 수만평의 밭을 빌려 한겨울만 빼고 작물을 넣다 뺐다 해도 남은 것이 쭉정이, 빚더미다. ‘나’마저 농업에 배신 때리면 안 되는데 하며 고개 떨구는 후배에게 “야, 찻집에서 우리 농산물로 만든 차와 음식 팔고 작은 음악회나 전시회도 하자”며 애써 달래보지만, 350만명이라는 농업인구에서 마이너스 하나 둘을 셈하며 무거워지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젖소를 키우는 은경언니도 “대형화·기계화해서 경쟁력을 갖추라 해서 축협, 농협 대출 받아서 잔뜩 투자했는데 전면 수입개방되면 투자비나 건질란가 모르겠어”라며 근심스런 한숨을 보탠다. 어젯밤 기사 검색하다가 ‘20년 농사에 남은 건 아들 하나와 1억9천만원의 빚’이라는 제목을 보고 혹 아는 이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순창에서 농사짓는 찬숙언니네 부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이 벌써 대학생이 되었구나”라는 짧은 상념도 잠시, 누런 논 한가운데서 가을 햇살 받고 선 부부의 사진이 씁쓸하다. 연대보증으로 떠안은 빚이 1억원, 농사지으면서 늘어난 빚이 9천만원. 아마도 평생 못 갚을 돈이겠다. ‘힘내라’는 응원도 부질없는 짓 같아 그만뒀다. 농업에 삶을 바친 젊은이들에게 한국 농업은 계속 배신만 때릴 것인가? 정부여, 공약대로 농가 부채 좀 해결하자.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어린 부녀회장이 듬직하게도 동네일 본다 싶었는데 그것도 마음먹은 대로 안 되나 보다. “난 농사짓는 게 천직인디, 참 재미지거든. 근디 지은 대로 빚이 되니 살 수가 있어야지.” 수만평의 밭을 빌려 한겨울만 빼고 작물을 넣다 뺐다 해도 남은 것이 쭉정이, 빚더미다. ‘나’마저 농업에 배신 때리면 안 되는데 하며 고개 떨구는 후배에게 “야, 찻집에서 우리 농산물로 만든 차와 음식 팔고 작은 음악회나 전시회도 하자”며 애써 달래보지만, 350만명이라는 농업인구에서 마이너스 하나 둘을 셈하며 무거워지는 마음 어쩔 수 없다. 젖소를 키우는 은경언니도 “대형화·기계화해서 경쟁력을 갖추라 해서 축협, 농협 대출 받아서 잔뜩 투자했는데 전면 수입개방되면 투자비나 건질란가 모르겠어”라며 근심스런 한숨을 보탠다. 어젯밤 기사 검색하다가 ‘20년 농사에 남은 건 아들 하나와 1억9천만원의 빚’이라는 제목을 보고 혹 아는 이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순창에서 농사짓는 찬숙언니네 부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이 벌써 대학생이 되었구나”라는 짧은 상념도 잠시, 누런 논 한가운데서 가을 햇살 받고 선 부부의 사진이 씁쓸하다. 연대보증으로 떠안은 빚이 1억원, 농사지으면서 늘어난 빚이 9천만원. 아마도 평생 못 갚을 돈이겠다. ‘힘내라’는 응원도 부질없는 짓 같아 그만뒀다. 농업에 삶을 바친 젊은이들에게 한국 농업은 계속 배신만 때릴 것인가? 정부여, 공약대로 농가 부채 좀 해결하자.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