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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이언스크로키] 정십이면체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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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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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의 여러 부문 가운데 예나 이제나 우주론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 광막한 시공간에 밑도 끝도 없이 점점이 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은 한마디로 신비로움의 샘들이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인간의 영감을 자극해 신화, 종교, 예술, 철학 등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해왔다. 이런 때문인지 과학에 관한 주요 뉴스에 우주론은 거의 단골메뉴처럼 등장한다. 정확한 통계를 본 적은 없지만 반도체, 생명공학, 신소재 등 여러 가지 첨단분야가 경쟁을 벌이는 현대에도 우주론은 아마 선두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 다 빈치가 신성비례에 따라 그린 정십이면체는 우주를 상징한다.
최근 소식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의 합동연구팀은 우주의 크기는 유한하며 그 형태는 정십이면체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고대로부터 우주의 크기는 당연히 무한하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는 20세기 중반 크게 위세를 떨친 ‘정상우주론’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와 경쟁하는 ‘팽창우주론’은 우주가 유한하다고 주장했고 이들간에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이에 정상우주론을 제창한 프레드 호일은 1950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팽창우주론을 비꼬면서 ‘빅뱅’이라는 경멸적인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이 별명이 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에는 아예 정식 용어가 되었다. 그뒤 빅뱅 이론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가 축적되면서 정상우주론은 곧 사그라지고 말았다.

빅뱅의 초기 불덩어리는 엄청나게 뜨거웠다. 하지만 팽창함에 따라 싸늘하게 식어가면서 현재는 우주 언저리로부터 거의 끊어질 듯 미미한 열기만 보내오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열기를 ‘빅뱅의 메아리’라고 부른다. 마치 누군가 외친 소리를 쫓아가면서 탐구할 수는 없지만 그 메아리를 분석하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번 발표는 지금껏 구형이라 본 우주의 모습이 정십이면체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다고 말한다. 물론 이번 발표가 최종 결론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한 구형이 아닌 독특한 모양, 나아가 하필이면 정십이면체라는 점에서 새로운 신비로움을 전해준다.

정십이면체는 정다면체의 일종이다. 그런데 간단한 증명으로 정다면체는 오직 5가지뿐이란 사실이 밝혀지며, 2500년 전 그리스 시대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플라톤은 5가지 정다면체를 그의 사원소설과 절묘하게 결합했다. 그는 가장 날카로운 정사면체는 불, 안정하게 보이는 정육면체는 흙, 불안정하게 보이는 정팔면체는 공기, 가장 잘 구르는 정이십면체는 물에 대응시켰고,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는 정십이면체라고 했다. 이처럼 자연의 구조를 정다면체에 비유하는 전통은 중세에도 이어졌다. 행성의 운동을 처음으로 밝힌 케플러는 태양계의 전체적 모습을 정다면체와 구면을 결합시킨 정교한 모델로 설명했다.

이번 발표는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의 맥락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그들의 주장은 현대적 신화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주장대로 정십이면체에는 어떤 알지 못할 신비가 숨어 있어 우주는 반드시 그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번 발표에 대해서는 더욱 정밀한 관측장비를 통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 운이 좋으면 얼마 가지 않아 정십이면체의 유혹에 인간과 우주 중 누가 홀렸는지 밝혀질 것도 같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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