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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의미 없는 누드는 포르노다/ 성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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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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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누드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유진/ 전북 익산 이일여고

노인들의 성생활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에는 격렬한 정사 장면이 등장한다. 한국영화로서는 꽤 파격적인 장면이었지만 이 영화를 두고 포르노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교 장면은 단지 그 의도의 표현수단이었을 뿐이란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했고, <죽어도 좋아>는 한편의 영화로서 대접받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외설이고 무엇이 예술인가. 또 그 기준은 무엇인가. 누드집은 바로 이 해묵은 논란의 연속선상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누드’를 단순히 성의 상품화라고 여기는 것도, 예술로 인정해주는 것도 모두 진정한 대답이 될 수 없다. 누드이되 어떤 누드인가에 따라 그 사회적 위치는 확연히 달라진다. 일단, 우리 사회의 예술에 대한 기준은 확실하다.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웅장하고 멋진 미술품이라 해도 그저 장식품일 뿐이라면 그건 예술이라 할 수 없고, 선 하나만 그어놓은 그림이라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예술이 될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그럼, 누드집은 예술인가. 적어도 지금의 기준으로는 ‘아니오’다. 최근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연예인들의 누드집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이는 누드집이 우리 사회의 순결 이데올로기를 깨는 새로운 시도라 의미를 부여한다. 분명, 누드집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의 순결 또는 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제약이 약해졌기 때문에 누드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 누드집 때문에 사회가 변한 것은 아니다. 즉, 누드집은 그 현상의 결과일 뿐 원인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 시대의 대중들이 ‘누드집’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여성의 주체적 행동이라서? 누드집 속에 어떠한 생각들이 들어 있어서? 아니, 확언하건대 그건 단지 ‘벗었다’는 점 때문이다. 누드집의 열광 속에 과연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려가 조금이라고 녹아 있을까. 대중들이 그저 합법화된, 표현수위가 조금 낮은 포르노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대중들이 우매해서 누드집의 깊은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받아들이고 생각할 의도 자체가 없는 것이다. 아니, 설혹 누드집이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더라도 대중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진짜 누드’일 수 없다.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정치를 해도 국민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좋은 정치’라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연예인들의 누드집이 우후죽순처럼 퍼져나가는 것은 결국 하나의 유행일 뿐이 아닌가. 그들은 누드집을 스스로의 당당한 선택이라 말하지만, 성현아씨의 누드집 발간 이후 갑자기 번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주장이 그다지 사실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모두가 모여 여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누드집을 내야 한다고 결의라도 했다면 모를까 이렇게 갑자기 누드집 발간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은 시류를 쫓는 얄팍한 상업성으로 보일 뿐이다. 이혜영씨의 누드집이 큰 성공을 거두자, 너도나도 누드집을 내겠다고 전보다 더 극성인 것은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또 하나, 과유불급이라 했다. 연예인들의 누드집이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해도 지금처럼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면 그 여론이 부정적일 것임이 자명한데, 지금 우리 사회는 분명 누드집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많은 누드집이 나타난다면 순결 이데올로기를 깨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왜 순결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여성이 스스로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만드는가. 이유는 단 하나, 누드집의 진짜 목적인 그들의 이윤 추구 때문일 것이다.

물론, 누드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표현수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나 연극, 그림에서는 누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몸이란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금 연예인들의 누드집과 진짜 누드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진짜 누드에서 몸은 단지 수단일 뿐이고 본 목적은 따로 있다. 그러나 누드집에서는 몸 자체가 목적이 된다. 단지 벗은 몸을 보여주기 위해 누드집을 내는 것이다.

다시 한번 묻는다. 누드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도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가. 누드가 ‘진짜 누드’이기 위해서는 그 의도가 분명해야 한다. 의도 없는 누드는 포르노일 수밖에 없다. 누드집을 내는 연예인들이 정말 그들의 말처럼 ‘스스로의 당당한 선택’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누드집을 외설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만들고 싶다면 의도를 담아내라. 그것만이 누드집이 당당한 예술로서 인정받고 더불어 누드집으로 인한 성의 개방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칭찬과 아쉬움]

이번주에는 학생들의 참여가 매주 저조했다. 최근 여성 연예인의 누드집 선풍을 두고 ‘순결 이데올로기를 깨는 여성의 주체적 행동이냐 성상품화의 극단이냐’를 묻는 논술글에 기고량이 급감한 것이다. 주제 자체가 조금 무리한 설정이었다는 자성을 해본다. 그러나 예컨대를 심사하다보면, 학생들이 여성할당제, 자살 등 묵직한 주제에는 큰 관심을 보이는 반면, 좀더 문화적이고 일상적인 주제에는 글도 잘 보내지 않고 내용도 부실함을 느낄 수 있다. 덕분에 프로야구 경기에서 선수들 충돌을 다룬 문제나 연예인 누드집 선풍을 소재로 한 예컨대의 기고량은 바닥을 기록했다. 학생들이 사회현상을 다루는 큰 문제에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줄 알지만, 일상에 바탕을 둔 작은 이야기에는 취약한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자기 이야기에 취약한 우리 문화 풍토에 거대담론 위주로 진행되는 논술 교육의 방향이 겹쳐 빚어진 현상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경쟁을 뚫고 전북 이일여고 성유진 학생의 글이 예컨대로 뽑혔다. 성유진 학생의 글은 인상적인 서론에 비해 본론과 결론이 취약했다. 우선 영화 <죽어도 좋아>를 예로 시작한 서론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외설과 예술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제시한 부분도 명쾌했다. 그러나 본론 부분에서 누드집이 여성의 자기표현이 아니란 사실을 강변하는 듯한 어투로 중언부언했다. 물론 본론에서 누드집 선풍은 “‘벗었다’라는 점 때문이며” “대중들은 그저 합법화된, 표현수위가 조금 낮은 포르노를 즐기고 있을 뿐”이라고 분석한 부분이나 누드집이 쏟아지는 이유를 “이윤을 노린 얄팍한 상업성”이라고 지적한 단락은 높이 살만 했다. 군데군데 빛나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좀더 구체적인 사실을 짚어가며 예술이 아닌 외설이란 사실을 논증하는 실사구시적 태도가 부족했다. 결론 부분이 서론의 원칙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에 그친 점도 아쉽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어느 순간에 (여성 연예인) 모두가 모여 여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해 누드집을 내야 한다고 결의라도 했다면 모를까”와 같은 서술은 비현실적 논거로 글의 신뢰를 깨뜨리고 있다.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은 최근 흥행 열풍을 몰고 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예로 한국 사회의 성문화 엄숙주의를 지적하며 인상적인 서두를 열었다. 그러나 서양의 중세, 한국의 조선시대 등 성문화의 변천사 내용이 지나치게 많았다. 논술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된 내용은 마지막 한 단락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해준 학생의 글은 성문화 역사에 대한 논술글이 돼버렸다. 항상 자신의 글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울 명덕여고 김수련 학생은 앞의 두 학생 글과 달리 여성 연예인의 누드집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에 주목했다.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내면서 “좀더 당당해지기 위해, 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라는 순수한 동기를 강조함으로써 “해방 아닌 해방운동”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수련 학생의 글은 지나치게 논증의 역사적 범위를 넓게 잡아 글의 구성이 산만해진 단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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