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부츠를 사면 뭐해!

480
등록 : 2003-10-16 00:00 수정 :

크게 작게

[김경의 스타일앤더시티]

계절에 따라 유행 아이템을 갖춰 입기는 너무 힘들어

남자들은 좋겠다. 올 가을 겨울엔 세계의 내로라 하는 디자이너들이 죄다 작정한 듯 여자의 긴 다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아이템은 아찔한 부츠와 하체에 ‘쫘악’ 들러붙는 통 좁은 바지, 그리고 레깅스와 미니스커트라고 하는데, 뭐 여자 다리에 취해 견딜 수 없는, 견디기 어려운 이 불황의 시간을 잠깐이라도 잊어보자는 합의가 아닌가 싶다.

신께서 여자를 창조한 이유가 그러하다는데, 나 역시 올 가을 브리지트 바르도가 되어 시대의 ‘기쁨조’가 되고픈 마음이 굴뚝 같다. 같은 60년대풍의 미니스커트라 하더라도 이번 시즌에는 사랑스럽지만 어딘지 불량스러운 브리지트 바르도 룩이 더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 나이 서른둘에 맨다리에 앙증맞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종아리까지 오는 길이의 부츠를 신는 건 역시 좀 무리다.

어쨌든 나도 부츠를 사긴 샀다. 가죽이 너무 얇아 스타킹처럼 다리에 들러붙는,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부츠였다. 내가 만드는 패션지에서 보아둔 스타일을 동대문 시장에 가서 샀다. 물론 검정색 레깅스도 샀다. 80년대 패션이 남긴 가장 위대한 산물(레깅스가 그만큼 잘나서가 아니라 그 밖의 다른 80년대 유행 아이템들이 죄다 무섭고 부담스러워서인 듯)이라고 하는 바로 그 아이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레깅스는 미니스커트나 타이트한 팬츠보다는 더 적나라해 소화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일단 거울 앞에 섰다. 레깅스 위에 부츠를 신고 상의는 검정색 브래지어만 착용한 채 거울을 봤다. 기분이 묘했다. 왠지 이쯤에서 채찍을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전의를 가다듬고, 그 위에 일명 시고니 위버 티셔츠라고 부르는 흰색 러닝셔츠를 입고 단순하고 풍성한 남성 라인의 검정색 코트를 매치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거울 속의 여자를 째려봤다. 그런 대로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글래머러스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폭을 넓게 하여 힘차게 걷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다이내믹한 레깅스 차림에는 80년대 팝스타나 슈퍼모델 같은 태도가 필수라고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 다음날, 그 전날 밤 거울 앞에서 완성한 스타일 그대로, 그 보폭 그대로 압구정동에 나갔다가 눈에 번쩍 띄는 여자를 발견했다. 어딘지 내 차림하고 비슷한데 센스가 나보다 한수 위였다. 레깅스에 남성용 화이트 셔츠(아버지 소유인 듯)를 입고 커다란 가죽 백과 앞코가 뾰족한 블랙 슈즈로 마무리한 차림이었다. 게다가 발목에는 보통 사람들이 덧신이라고 부르는 ‘워모’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동안 기가 죽어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패션 에디터가 내 기를 살려주었다. “잘 입긴 했는데, 저 차림은 영화 <미인>의 여주공 차림을 거의 그대로 베낀 거야. 워모로 센스를 발휘한 건 그나마 높이 쳐줄 만하지.”

그런데 부츠와 레깅스를 구입한 지 한달이 넘어가는데 그 아이템을 착용한 날은 달랑 3일밖에 되지 않는다. 하체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아이템을 잘 소화하기 위한 핵심은 상하 대비다. 말하자면 짧고 풍성한 스타일의 웃옷이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내 경우 그 코트말고는 별다른 아이템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못 말리는 와이드 팬츠 신봉자이다. 그 와이드 팬츠에 어울리는 웃옷은 많지만 그건 다리를 강조한 부츠나 레깅스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아,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다. 뭔가 또 사야 한다는 것이다. 와일드해 보이는 바이커 재킷과 캐시미어 스웨터 같은 거. 여기서 여성 동지들게 한 말씀. “유행 아이템을 사들이기 전에 옷장 먼저 점검하세요. 저 거덜났거든요!”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