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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속옷은 세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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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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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여자들이 속옷 공수 대작전까지 벌이는 까닭을 남자들은 아는 걸까

새로운 뉴욕 트렌드를 소비하느라 언제나 가랑이가 찢어지는 동네 서울 청담동. 그곳에서도 요즘 한창 인기 있다는 뉴욕식 오가닉 바(오가닉 하면 식물성 같지만 뉴욕식 오가닉 하면 어째 동물성이 순식간에 짙어진다)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 초장부터 대화가 ‘섹스 앤 더 청담동’이 되어버렸다. 한 독신 포토그래퍼가 자리에 앉자마자 여자들을 향해 이런 난처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보기에 내가 너무 동물적으로 보이나? 최근에 어떤 여자랑 같이 자러 가는 분위기까지 조성됐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나중에 하자는 거야. 나랑 자고 싶다는 건지, 자고 싶지 않다는 건지 여자들 마음을 통 모르겠다고. 여자인 당신들 생각은 어때?”

그는 다소 절망스러운 듯 말했지만 나는 순간 씹고 있던 유기농 가지며 토마토와 함께 가벼운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게요. 아마도 애초부터 잘 마음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그날 팬티와 브라 컬러가 맞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히 짝짝이였을 거예요.”


그건 정말이다. 스물일곱살 나이에 아직 처녀라는 사실을 몹시 ‘억울해하던’ 한 후배에게 얼마 전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왔다. (정말 많이 변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진지하게 처녀막 수술을 고려하던 내 친구를 생각하면 확실히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자 주변에서 더 난리가 났다. “일단 술을 적당히 마셔두는 게 좋을 거야.” “알았어.”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 “알았다니까. 적당히!” “그런데 당연히 속옷은 세트겠지?” “아니.”

아뿔싸! 이 대목에서 모두들 절망했다. 결국 그 애는 남자 집으로 떠나기 1시간 전에 돌연 ‘오늘은 일단 철수’를 선언해버렸다. 아무리 급해도 검정 브라에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분홍 팬티 차림으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투피스는 물론 거실 소파까지도 세상의 모든 종류의 ‘세트’ 상품에 저주를 퍼붓는 부류라 하더라도 속옷만큼은 확실히 예외다.

내 경우 장기간 애태우던 남자와의 첫 여행을 위해 친구가 속옷을 뉴욕에서부터 공수해다준 일도 있었다. 그때도 나보다 친구가 더 흥분했다. 여행 떠나기 3일 전, 친구랑 저녁 시간 내내 쇼핑을 했지만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극히 시크한 스타일을 원했다. 영화 <싱글즈>에서 장진영이 입었던 러닝셔츠와 짧은 반바지 스타일의 팬티처럼. 그런데 당일날 오전, 뉴욕 출장 갔다가 방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친구는 CK 러닝셔츠와 팬티를 사들고는 김포공항까지 와서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기어코 나에게 ‘그 꿈의 팬티’를 안겨주였다. 좀 우습기는 하지만, 확실히 눈물겨운 우정이었다. 남자들의 폼나는 의리와 달리, 여자들의 우정이란 언제나 이런 식의 희극이거나, 지독한 비극만이 있을 뿐이다.

속옷에 관한 한, 여자란 확실히 뻔뻔스럽고 별스러운 동물들이다. 파티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서슴없이 묻는다. “그런데 그 브라 어디에서 샀어요?”

그런데 정작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의 속옷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날 입은 여자의 팬티를 기억하는 남자라면 거의 게이이거나 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여자가 블랙 T팬티를 입고 있든 아줌마 ‘빤스’를 입고 있든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누가 신경쓰나? 멋진 속옷은 자신만의 훌륭한 비밀이 될 수 있다. 마치 봄에 심을 나팔꽃 꽃씨를 가을에 사는 것처럼.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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