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선 대충 마초인 남자 차승원, 그러나 연기에 관해선 대충이란 없다
꽤 오래 전, 모델로 인기의 절정을 누리던 그가 한 토크쇼에 나와서 건들건들 사회자의 말발을 거드는 걸 몇번 본 적이 있다. 불편해 보일 정도로 긴 다리보다도 인상적이던 건 그의 세련되고 재치 있는 말솜씨였다. 끼 있는 연예인이 하나 늘었나 보다 했다. 몇년 뒤 영화에 출연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영화를 스타의 관문으로 생각하는 연예인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리베라메>에서의 그의 모습은 너무도 진지해서 반쯤 누워서 비디오를 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친구가 정말 배우를 하려나 보네.’ 그리고 불과 2년 남짓 뒤, 이제 그는 누가 뭐래도 한국 남자배우들 중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배우가 됐다.
‘힘 빠진’ 연기를 할 수 있는 비결
직접 만나본 그의 외모는 생각보다 훨씬 더 완벽했다.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난 완벽한 외모를 가진 배우들 중 그만큼 ‘죽이는’ 연기를 해내는 배우를 별로 보지 못 했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꽤 위로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한데 차승원, 이 남자는 이런 외모에 경력 10년도 안 돼서 벌써 ‘힘 빠진’ 연기를 하다니…. 말로는 우아하게 “팬이에요”했지만 속에선 질투심이 확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게다가 20살에 부모가 되고 가장이 된 사람답게 나이보다도 훨씬 어른스러워서 선배 소리를 듣기가 쑥스러웠다. 자신의 네티즌 팬카페에서는 아줌마처럼 수다 떠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라크를 침공한 부시에 대해서는 “힘 가진, 교만하고 교활한 지도자에게는 역사의 모진 심판이 내려져야 한다”고 똑 부러지게 얘기한다.
남자배우는 연기만 잘 하면 뜨는데 여배우는 왜 여전히 외모가 중요시되는 것 같냐고 물으니까, 남자들은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연기를 하지만 여자들은 스스로 소모성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단다. 구조적 모순에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젊은 여배우들을 철없는 소녀들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뭐 솔직히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느새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는 대화 방법을 몰라 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고, 아내는 전형적인 ‘마누라’이며 그런 아내의 모습이 좋다고 한다. 세련된 마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척 합리적이어서 아내와의 사이에 별 대화는 없어도 이미 커다란 신뢰의 강이 흐르고,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유를 준다고 한다. 말로만 번지르르 하게 페미니즘을 외치면서 실천은 하나도 못하는 철없는 남자들보다 철든 마초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까?
힘 빠진 연기를 할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현실과 영화가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고, 자신은 그저 현실을 사는 생활인이란 사실을 연기할 때도 잊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단다. 그리고 180도 변신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배우들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해내는 건 가짜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맞는 말이다. 언젠가도 한 말이지만 다중인격자가 아니고서야 아무리 천재 연기자라도 ‘변신’은 불가능하다. 그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끄집어낼 뿐인 거다. 그들이 말하는 변신이라 함은 ‘연기’가 아닌 그저 이미지 변신을 말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연기철학들을 모델 출신이며 전문적으로 연기 공부를 한 적이 없는 그가 어떻게 체득할 수 있었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내린 결론.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점과 설경구, 성지루 같은 배우들이 막역한 지인이라는 행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무서운 욕심 덕인 것 같았다.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기에 그 사람은 온 세상을 통틀어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배우니까 그 사람을 기준으로 삼았다가는 스트레스만 받을테니 기준을 다른 데에 두면 어떻겠냐니까 싫단다. 그러면서 자긴 그게 언제가 됐든 ‘최고’ 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욕심이 밉다거나 허황되게 들리지 않은 건 그게 그저 단순한 명예욕이 아니라 연기 맛을 알기 시작한 배우, 연기에 한참 약이 올라 있는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욕심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 시나리오’만 받는다
배우에게 제일 중요한 건 시나리오 선택이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시나리오란 대박날 물건이 아닌 ‘말’이 되는 시나리오. 얼마 전, 어떤 작품이 들어왔는데 ‘말’이 안 되더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절했고 그 작품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대박이 났다. 하지만 조금도 후회되지 않더란다. 그리고 그런 ‘말’이 안 되는 시나리오로 연기를 해서 인기를 얻은 배우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제일 두려운 건 뭐냐고 물었다. 바로 그런 자신의 심지가 시간이 갈수록 흐려지진 않을까 하는 거란다. 그리고 제일 고민되는 것은 ‘어떡하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나, 어떡하면 내 몸뚱아리를 내가 생각한 것처럼 놀릴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떡하면 내가 경험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것을 뽑아낼 수 있을까’하는 거란다. 그는 모르고 나만 알고 있는 연기비법의 책이 있다면 구해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도 절실했다. 하지만 그런 책은 없다. 있다 한들 그는 이미 그 책이 필요 없어 보였다. 다만,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하리라.
인터뷰 코너를 소개하기 위해 가져간 <한겨레21>의 겉표지엔 비에 젖은 김정일 사진을 보고 속상해서 우는 북한 여대생 응원단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그걸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북한 사람의 정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통일 그거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최소한 우리 세대 땐 안 될 것 같다고 한다. 실생활에선 대충 보수적이고 대충 마초인 이 남자. 유독 연기만큼은 대충이 없었다. 한번도 즐기면서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단다. 의외였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것, 그러면서 자신을 닦달하는 걸 즐겼을 뿐, 즐기면서 연기를 하기엔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내가 그가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배우가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건 이런 이유였다. 즐기면서 연기를 하기엔 세상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딴따라’로 온 우리들이 연기를 주어진 ‘미션’이 아닌 즐기면서 해야 하는 건 연출가 이윤택이 쓴 책 제목처럼 우리에겐 또 다른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배우가 되는 건 시간 문제인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질투가 나더라도 참 행복한 일이 될 것 같다.
오지혜 | 영화배우
사진 |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남자배우는 연기만 잘 하면 뜨는데 여배우는 왜 여전히 외모가 중요시되는 것 같냐고 물으니까, 남자들은 ‘끝장’을 보겠다는 각오로 연기를 하지만 여자들은 스스로 소모성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단다. 구조적 모순에서 원인을 찾기보다는 젊은 여배우들을 철없는 소녀들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뭐 솔직히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어느새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는 대화 방법을 몰라 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고, 아내는 전형적인 ‘마누라’이며 그런 아내의 모습이 좋다고 한다. 세련된 마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척 합리적이어서 아내와의 사이에 별 대화는 없어도 이미 커다란 신뢰의 강이 흐르고,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유를 준다고 한다. 말로만 번지르르 하게 페미니즘을 외치면서 실천은 하나도 못하는 철없는 남자들보다 철든 마초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까?

사진/ 연기에 대한 그의 욕심이 허황되게 들리지 않은 건 그게 연기 맛을 알기 시작한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욕심이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