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실험실은 진화한다

479
등록 : 2003-10-09 00:00 수정 :

크게 작게

<네이처> 광고의 생물학 실험기기 변천사… 자동화에 기반한 ‘생체 밖 실험실로’ 이동

“게임의 법칙. 목표―당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핵산의 서열과 크기, 양을 결정하는 것. 게임방법―유전자 분석방법을 선택한다, 핵산을 분석한다, 결과를 해석한다. 승리―가장 효율적으로 결과를 모아 먼저 발표하는 사람이 게임에 이긴다.” 2000년 3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DNA 분석기기의 광고 문구다. 지난 8월 초 대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열린 한국유전체학회 학술회의장. 실험기기업체들이 전시한 최신 자동화 실험기기의 로봇 팔이 DNA 조각을 얹은 유리판을 DNA 증폭기인 중합효소연쇄반응(PCR)에 넣었다가 꺼낸 뒤 데이터를 고속으로 검색·판독하는 분석기에 집어넣었다. 곧이어 컴퓨터 화면은 분석결과를 토해낸다. 이처럼 실험실 도구들이 대량분석과 자동화 성능을 점차 고도화하며 힘을 키우고 있다.

▷ 1950 · 60년대 <네이처>에 실린 각종 실험도구 광고.

일상용품 기능 극대화한 40년 전 도구들

실험기기업체 바이오니아 박한오 대표는 “15년 전쯤엔 2천여개 염기쌍만 분석해도 대단하게 평가돼 남보란 듯이 학술논문 1편을 쓸 정도였으나 이제는 수천만개 염기쌍 분석결과조차도 크게 주목받지 못할 상황”이라며 점차 ‘속도’와 ‘대량분석’이 실험도구의 모습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흐름은 소비자인 실험실 연구자들을 겨냥한 실험도구 광고에서도 나타난다. 1950~2000년대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과학, 특히 생물학 분야 실험기기의 광고물을 10년 간격으로 한달치씩 살펴보았다. 그 결과, 실험도구는 1990년을 전후로 컴퓨터와 결합해 불과 10~15년 만에 급격히 탈바꿈하며 현대 실험실의 모습을 바꿔온 것으로 나타났다. 그 변화의 방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먼저 1950, 60년대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첨단’이던 실험도구들은 대체로 ‘계측’이나 ‘관찰’ 도구(마이크로미터, 액체비중계, 분광계, 현미경, 입체경 등 주로 ‘-meter’나 ‘-scope’의 접미사가 붙는 도구)에서 나타났다. 이는 당시 실험실에서 미생물, 세포, 바이러스, 단백질 등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실험활동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당시 광고물은 소비자인 실험실 연구자들한테 정확성과 정밀성이 매우 큰 경쟁력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실험도구의 오차율 정보를 부각한 점이 눈에 띈다. 예컨대 1960년 3월치 광고를 보면, 계측 도구들은 대체로 무게는 0.01g까지, 길이는 0.00005㎜의 오차율로 측정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강조했다. “100년 전통의 가문에서 생산된 현미경” 등 광고문은 당시 값비싼 실험도구들이 명품 중심으로 소량생산됐음을 보여준다.

사진/ 자동화 실험기기의 로봇 팔이 DNA 조각을 담은 유리판을 DNA 증폭기(사진 왼쪽 위 상자 모양)에서 꺼내어 분석기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20세기 중반 광고의 주된 대상은 실험실 주변도구들이었다. 측정시간을 재는 스톱워치는 1960년대까지 중요한 광고물로 다뤄졌으며, 실험재료를 크기에 따라 걸러내는 체, 고열을 만드는 오븐, 고압에 견디는 관, 실험대상을 고정하는 유리판, 견본을 보관하는 병, 여과종이 등은 단골 광고였다. 또 전자현미경에 필요한 진공기술이 주목받았으며, 물질을 정밀하게 분리하는 전기영동기·크로마토그래프, 방사능 동위원소를 이용한 생리물질 표지 추적기술 등에서 점차 발전이 이뤄졌다. 실험실 밖 사람들에게 실험결과를 설명할 때 주로 쓰는 프로젝터도 이 시기에 연구자의 관심을 끌었다.

실험실 풍경은 1990년 전후를 기점으로 실험기기들이 컴퓨터와 급속히 결합하며 탈바꿈했다. 이 시기 광고물들은 측정과 관찰의 정확성에 더해 실험결과를 얼마나 빨리 내놓느냐, DNA·단백질 등 미세물질을 얼마나 순수하게 분리하느냐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분석방법은 당신(연구자)의 능력을 증진시킨다”는 문구를 앞세운 고속 실험기기의 광고가 대세를 이루었다. 2000년대 들어 신약 후보물질을 대량으로 고속 검색해내는 기기는 ‘첨단’의 흐름이 됐다.

컴퓨터는 실험 자동화에 크게 기여했다. 단순 반복되는 복잡한 실험과정은 모두 ‘블랙박스’처럼 감춰져 실험실은 더 이상 그 과정을 직접 되풀이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실험은 이제 맨눈과 맨손으로 하던 시대에서, 연구자가 실험 프로그램을 짜고 실험기기의 스위치를 켜면 실험과정의 ‘블랙박스’를 컴퓨터가 자동 제어해 데이터를 생산하는 시대로 점차 나아갔다. 실험과정을 칩 하나가 간편하게 대신하는 ‘랩온어칩’ 기술은 이런 자동화의 한 사례로 꼽힌다. 이로써 실험결과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으며, 똑같은 실험과정을 병렬 진행하는 방식은 실험시간을 크게 줄여주었다. 인간 게놈(유전체) 지도를 작성한 인간게놈프로젝트는 이런 실험도구의 자동화가 이룬 산물이다.

실험 자동화는 과학계에서 이미 중요한 관심사가 되면서 이를 주제로 한 실험기기업체들의 전시회와 심포지엄은 물론, 자동화 실험이 낳은 새로운 실험의 성격을 논의하는 학술모임들도 1990년대 후반 잇따라 열렸다. 박한오 대표는 “이젠 웬만한 연구자는 얼마 전엔 생각하지도 못했던 미생물의 유전체 해독을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대량화·자동화는 실험실 환경을 급속히 바꾸고 있다”며 “기계가 아니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연구기획 등을 중시하고 배려하는 실험실의 문화가 더욱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실험대상의 특수한 성질만을 고도로 분리·증폭하는 것도 현대 실험도구의 진화 방향으로 등장하고 있다. 1950, 60년대엔 실험도구들이 소독용 압력솥, 체, 유리판, 오븐, 저울 등과 같이 대체로 일상도구의 기능을 극대화한 것이었다면, 현대의 실험도구들은 DNA 증폭기, 항체 생산기 등 일상도구의 기능과 완전히 독립된 고유한 기능을 갖춰왔다. 실험실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자연상태로 관찰되는 ‘생체 안에서’(in vivo) ‘생체 밖 실험실로’(in vitro)가 더욱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DNA 추출” “RNA 분리·정제” 등과 같이 ‘분리’ ‘정제’ ‘격리’ 등은 현대 실험도구 광고문에서 가장 자주 쓰는 말이 됐다.

실험 자동화의 성과… 다국적기업이 주도

광고문을 보면, 실험기기업체의 대형화 추세도 한눈에 나타난다. 실험기기가 고속화·자동화하면서 1960년대만 해도 광고주인 실험기기업체들은 소량생산에 의존하거나 지역에서 시장을 찾는 소규모 업체가 다수를 이뤘으나, 최근 광고물들은 이미 실험실의 변화를 이끄는 중심이 소수 다국적기업임을 보여준다. 20세기 중반 이후 실험실에서 실험도구의 진화는 △더 많은 재료를 더 빠르게 분석하며 △실험대상을 더욱 정교하게 분리·정제하고 △단순반복의 실험작업을 자동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실험실 환경이 갈수록 시간과 다투는 국제적 경쟁의 현장이 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미래산업으로 꼽히는 신물질 발굴과 특허 확보 경쟁은 이런 실험도구의 진화를 더욱더 재촉한다. 이관수 한국기술교육대 강사(과학기술사)는 “실험도구는 연구자의 능력을 키워주며 연구 내용은 물론 연구 방향까지 바꾸기도 하는 적극적 존재”라며 “달라진 실험실 환경에 걸맞게 창조적인 실험실 문화의 탐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 한겨레 사회부 cheolwoo@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