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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연] 현대사회의 비극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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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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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대음악가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리즘을 체험하는 이색적인 무대 ‘필립 온 필름’

현대음악이 어렵다는 데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현대음악이 무조음악 같은 전위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데 비해 미국의 현대음악은 달랐다. 존 케이지 또는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작곡가들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을 향해 노를 저었다. 미국 현대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66)가 도착한 해안선은 ‘미니멀리즘’이었다. 음악의 미니멀리즘은 ‘반복과 변주’로 설명된다. 아주 짧은 선율을 몇번이고 반복 연주하면서 점차 원래의 선율을 조금씩 변형시킨 패턴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인데, 이렇게 음악의 다른 결을 중첩시켜 선율과 선율 사이에 갖가지 엇갈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짧은 선율 반복하며 변형 패턴으로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리즘을 싱싱한 ‘날것’으로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필립 글래스와 그가 이끄는 12인조 악단 ‘필립 글래스 앙상블’이 내한해 스크린 아래서 연주를 펼친다. ‘필립 온 필름’(10월14~15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이번에 상영되는 영화는 필립 글래스가 미국의 컬트 다큐멘터리 감독 고드프리 레지오(63)와 함께 만든 <균형 잃은 삶-코야니스콰씨>(1983년작), <변형 속의 삶-포와콰씨>(1987년작)로 ‘삶(콰씨) 3부작’ 중 2편이다. 지난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최근작인 <전쟁 속의 삶-나콰이콰씨>(2002년작)가 나란히 상영되기도 했다.

작품 제목 옆에 붙은 낯선 언어는 미국 인디언 호피족의 언어다. 문자조차 없는 호피족 언어를 굳이 제목으로 단 이유는 고드프리 레지오의 ‘선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나는 기술의 역작용에 대해 최소한 깃발을 들어 호소하고자 했다. 그것은 낙담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다.”

‘환경과 테크놀로지’의 충돌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코야니스콰씨>의 도입부는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태초 원시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장대한 절벽과 귀를 뚫을 듯 퍼붓는 폭포의 거대한 물줄기는 원자탄의 버섯구름, 뉴욕의 황폐한 빈민가에 화면을 내주고, 숨막히는 풍경 속에서 음조 중심의 코러스와 현악기의 미니멀한 선율은 관객의 귀로 ‘침투’한다.

▷ 필립 글래스의 음악은 미니멀리즘에 월드 뮤직 등이 접목되어 신비로운 이미지를 뿜어낸다. 영상과 음악이 함께하는 필립 앙상블의 무대. <코야니스콰> 중에서.(위로부터 아래로).
<코야니스콰씨>가 북반구의 ‘불균형’에 초점을 맞췄다면 <포와콰씨>는 남반구의 평화와 그를 침해하는 대도시와 기술의 덫을 이야기한다. 갠지스강에선 아낙네들이 투닥투닥 빨래를 하고 아프리카 소녀는 아름다운 저녁놀 속에 땔감을 지고 걸어온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곧 비참으로 변한다. 남미 여인은 나뭇단을 가득 지고 힘겹게 걸음을 떼놓고 동유럽의 어린 소녀는 피곤에 곯아떨어진 아버지를 대신해 마차를 몬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은 미니멀리즘 위에 월드뮤직·동양음악을 다채롭게 조화시켜 이국적이고도 신비로운 이미지를 뿜어낸다.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한 독특한 이력의 필립 글래스는 이후 뉴욕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인디아·아프리카 민속음악을 폭넓게 접했다. 1970년대 뉴욕으로 돌아와 필립 앙상블을 창립한 뒤 클래식뿐 아니라 발레·퍼포먼스·영화음악 등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쿤둔> <디 아워스> 등에서 보여준 그의 스타일은 영화의 배경음악 정도로 삽입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편 내내 영상을 억누르듯 일관되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 서울 공연에서는 직접 키보드를 연주하며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미니멀리즘 세계를 보여줄 예정이다. 한편, 감독 고드프리 레지오는 이미지 영화의 창시자로 매체의 발달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일찍이 관심을 둔 사회개혁가이자 가톨릭 신부다.

필립 글래스에 대해 더 궁금한 점이 많다면 그의 홈페이지(www.philipglass.com)를 방문하면 된다. 홈페이지에 올려진 방대한 영어 자료에 넋놓기보다는 오른쪽 상단에 있는 ‘글래스 엔진(glass engine)을 클릭해보라. 필립 글래스의 음악을 시기, 연주길이 등에 따라 감상 할 수 있다.

참조: www.sweetfishing.hihome.com, www.changgo.com. 김승곤(서울대 음대 교수) <미니멀리즘과 필립 글라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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