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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코끼리는 사자굴에서 버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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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1-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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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10명의 사령탑 삼킨 감독의 무덤… 엄청난 투자에도 감독이 죽쑤는 이유

(사진/유능한 야구인의 무덤으로 불리는 삼상 사령탑을 맡은 김응룡감독)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도둑 프로크루스테스의 집에는 침대가 하나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나그네가 지나가면 집안으로 불러들여 침대에 눕혔는데 나그네의 키가 침대 길이보다 길면 몸을 잘라서 죽이고,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몸을 늘여서 죽였다. 자기 생각에 맞춰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는 횡포, 행동 등을 보통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하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한 구단에서 진행된 사건은 그리스 신화의 재현을 연상케 한다. 삼성 라이온스에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가 19년 동안 놓여 있다.

플레이오프서 재계 라이벌 현대에 4차전까지 내리 져 4-0 충격의 패배를 당한 뒤 김용희 삼성 감독이 사퇴를 표명했다. 삼성 라이온스는 또다시 유능한 야구인들의 무덤임을 입증한 꼴이 됐다. 김 감독의 사퇴로 삼성은 감독 대행 2명을 빼고도 11번째로 신임 감독을 맞이할 운명이다. 이는 첫해를 제외한 18차례의 시즌 동안 1년8개월마다 1명씩 감독을 갈아치운 것이 된다.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비명횡사


(사진/플레이오프 연패로 사퇴의사를 표명한 김용희 삼성감독)
감독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자. 70년대 후반 고교야구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경북고-선린상고 라이벌전서 경북고 사령탑을 맡았던 서영무 초대 감독이 신병으로 1년여 만에 중도하차했다. 이후 9명의 감독은 모두 성적 부진을 이유로 들어 구단이 목을 내려친 케이스다. 60년대 실업야구의 홈런 타자이자 초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 박영길(87∼88시즌), 한국 야구의 명포수 계보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정동진(89∼90), 부연 설명이 필요없는 명장들 가운데에는 김성근(91∼92), 백인천(96∼97), 서정환(98∼99)씨 등 5명이 옷을 벗었다. 80년대 초반 제2대 이충남 감독은 5개월 동안 31승36패의 성적을 거둬 역대 삼성 가운데 최단명을 기록. 모두가 페넌트레이스의 나쁜 성적과 포스트시즌의 충격적인 패배를 이유로 들어 해임된 경우다.

삼성은 왜 툭하면 감독을 갈아치울까.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야구 원년인 82년부터 지금까지 삼성은 단 한 차례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타구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투자를 쏟아붓고도 목말라하는 우승을 해보지 못했으니 그 원한이야 남다르다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충분히 투자하고, 인재들은 뛰어나다. 그런데 우승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 책임이다.’ 감독의 목을 쥐고 있는 프런트의 해답은 이처럼 간편하게 귀결된다. 새로운 감독 영입=한국시리즈 우승. 이러한 간편 도식은 삼성 프런트 사이에서 신념처럼 구체화됐고 신임 감독이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때마다 마약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저 사람을 한번 데려다 앉히면 어떨까, 아니 저 사람은….’ 선수 쇼핑은 물론이고 감독 스카우트도 그간 계속 진행돼온 일 중 하나였다. 삼성 감독을 거치지 못하면 결국 무능한 야구인이라는 얘기가 돼버린다.

삼성 프런트의 이러한 독특한 야구문화를 기자들이 지적해올 때마다 코방귀를 뀌는 이가 있다. 바로 백인천 전 삼성 감독이다. 백 감독은 삼성서 떠난 뒤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밖에서 보고 지적해서는 잘 모른다. 유니폼을 입고 그 안에 있어봐야 안다. 삼성은 그런 곳이다.” 지금도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르나 김성근 전 삼성 감독(현 삼성 2군감독)은 90년대 초반 삼성을 맡으며 “구단 프런트에서 내 작전과 지시를 방해하기 위해 감독 방에 도청장치를 해놓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심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구단의 압박이 심상치 않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 김용희 감독의 삼성호가 한국시리즈 탈락이 결정되기 전에 앞서 삼성 프런트는 이미 후임자를 물색해 왔고 김응룡 감독과 접촉에 들어갔다. 김용희 감독은 이런 운명을 알면서도 ‘이번이 내 야구인생의 마지막’이라며 전의를 불태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대장을 전장에 내보내놓고 이미 교체를 검토한 삼성이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행태다.

삼성은 이미 지난해 김응룡 감독을 영입하려다 박건배 해태 구단주의 강력한 고사 요청과 대구지역 정서에 밀려 한 차례 시도가 좌절된 바 있다. 삼성은 2000시즌 반드시 우승한다는 각오로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LG의 김동수와 해태 이강철을 각각 3년간 총액 8억원씩, 16억원을 들여가며 영입했으나 이러한 과감한 투자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동수는 진갑용에 밀려 후보 포수로 나돌았고 지난해 1년여를 부상으로 쉬었던 이강철은 단 한번도 좋은 피칭을 보이지 못 했다. 삼성은 이강철을 플레이오프서 패전 처리로 기용했다. 김응룡 감독과 자유계약 선수의 스카우트 구상은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전수신 삼성 사장이 진행했는데 그는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원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려다 낙선한 바 있다. 프로야구사의 획기적인 모험은 사실상 실패했고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삼성 라이온스의 비극이다.

얘기를 잠깐 바꿔 프로야구 초창기로 돌아가 보자. 삼성 라이온스의 연고지인 대구·경북지역이 어떤 곳인가. 일찍이 야구인재라는 인재는 죄다 이 지역서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대 초반 전국대회 전관왕을 달성했던 경북고와, 이만수·장효조를 배출해낸 대구상고로 대표되는 인재의 풀은 프로야구 탄생에서도 단연 선두주자였다. 서정환 전 삼성 감독은 대구·경북지역에 야구인재가 많았던 이유를 독특하게 설명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경북 야구는 일제시대부터 야구 기본기를 갖춘 해박한 일본인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았고 사실상 이때 전수된 게 많다. 일본에서 전수된 야구는 경성제일고보(지금의 경기고), 평양제일학교, 경북고 등 일본의 식민지배 통치를 위한 엘리트 양성소에서 주력하는 운동종목이었는데 경기고는 해방 뒤 야구부가 폐지됐고 평양과는 교류가 없었다. 경북고가 성인야구의 최강자로 군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김응룡은 프로크루스테스를 넘어설 건가

(사진/삼성이 거액을 들여 스카우트 했지만 패전 처리 투수로 전락한 이강철)
영남대를 나온 김재박 현대 감독도, 대구 출신의 이광환 전 LG 감독도 경북고 진학이 어려워지자 서울로 전학 온 케이스다. 이 정도로 경북 야구의 인재풀은 크기와 규모에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고교-실업야구의 전성기를 달리던 지역이 야구의 제3시대라 할 수 있는 프로야구를 만난 뒤 84년 비운의 준우승 이후 단 한 차례도 우승을 못했으니 그 한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삼성은 93년까지 6번 한국시리즈에 올라 모두 패했고 93년 이후엔 단 한 차례도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이 후유증은 대단하다. 특히 투자에 선구적인 삼성이 프로야구의 한축을 담당하지 못하자 구단 안팎으로는 기형적인 세력들이 자라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엔 건설적인 비판 세력이었으나 갈수록 구단을 들었다 놓았다 하려는 ‘골치아픈’ 집단으로 변질됐다. 삼성 프런트는 대구지역의 야구후원회 등을 비롯해 야구인들의 등쌀에 골머리를 앓는다. 안 되는 집안일수록 파벌과 계파가 많은데, 삼성은 유달리 누구 사람, 누구 사람 등이 많다. 삼성호의 지리멸렬한 항해가 계속될수록 그러한 모습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영원한 우승 후보’라는 가슴 아픈 닉네임을 달고 사는 삼성은 이제 신임 감독으로 해태를 9차례나 우승시킨 김응룡 감독을 영입했다. 한국시리즈 V9의 명장 김응룡 감독은 과연 삼성을 우승 시킬 수 있을까. 김응룡 감독은 “야구경기서 감독의 몫이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김응룡은 해괴한 도둑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일 영웅 테세우스가 될 수 있을까.

김성원/ 스포츠투데이 야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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