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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출판] 이것이 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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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10-01 00:00 수정 : 2008-09-17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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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문학의 원형 담은 ‘세계민담전집’… 깔끔한 번역으로 각국 특유의 정서 깊이 이해

중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하는 ‘~시리즈’류의 황당하고 재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 『세계민담전집』 황금가지 펴냄.
어디서 누가 만들어냈는지 알 수 없는 그 유머나 퀴즈들은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는데, 들으면 한동안 배를 움켜잡고 뒹굴어야 할 정도로 웃겼지만 한편으로는 억눌린 학교 생활의 부조리를 너무나 날카롭게 꼬집거나 ‘아하’ 하고 감탄사를 내지를 만큼 신선했다.

1차분 10권 출간… 현지어 직접 번역

민담(民譚)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이와 닮았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져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이야기들은 허술한 듯하면서도 그 공동체의 정서와 문화, 역사를 고스란히 솔직하게 드러낸다. 영웅이 등장하는 고매하고 우주적인 신화와 달리 보통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소박하고 노골적인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는 민담은 민중문학의 원천이며 서사(이야기)의 원형을 담고 있다. 민담에는 특정 지역과 시대, 사람들의 개별적 경험이 녹아 있는가 하면, 저변에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통되고 공유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가 흐른다.


황금가지가 내놓은 ‘세계민담전집’은 5년에 걸친 기획과 10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세계의 민담을 제대로 소개하려는 야심찬 노력의 결과다. 그동안 유럽이나 중국 등 강대국의 이야기 위주로, 그나마 어린이용으로 각색되거나 영어판과 일본어판을 거쳐 다시 번역돼 원래의 맛을 잃어버렸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당 지역과 언어 전공자들에게 직접 번역을 맡겼다.

1차로 나온 10권은 한국부터 유럽의 변방인 폴란드와 유고, 타이와 버마, 터키, 남아프리카, 스페인, 몽골, 러시아 등의 민담을 담았다. 신동흔(한국), 안상훈(러시아), 유원수(몽골), 장용규(남아프리카), 김영애(타이), 최재현(버마)씨 등 해당 언어 전공자들의 깔끔한 번역과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이 돋보인다. 내년 말까지 나올 나머지 20권은 더욱 낯설고 흥미롭다. 잉카·과라니, 인디아, 루마니아·체코, 중국의 한족과 소수민족, 이스라엘, 서아프리카, 이란, 아랍, 에스키모…. 낯선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번에 나온 책 중 <몽골 민담>에서는 원 제국이 무너진 뒤 수백년 동안 지배층 왕공들간의 내전과 중국의 침략을 겪으면서 힘겹게 삶을 살아온 몽골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몽골의 근세 민담 ‘척척 셍게’와 ‘바다이 탁발자’ 이야기는 청과 러시아의 식민통치를 받으며 안으로는 귀족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19세기 말 부자와 권력자, 도리를 모르는 자와 외세를 대표하는 중국인 고리대금업자 등을 골탕 먹이는 재간꾼으로 등장하여 민중에게 위안을 주었다. 특히 중간중간 가락에 실어 부르는 운문 구절을 지닌 몽골식 이야기의 원형을 고스란히 읽어볼 수 있다.

제국의 역사가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

가부장 사회인 남아프리카 줄루에서 민담은 경직된 사회질서를 완화하는 구실을 했다. 위계질서에 갇혀 활동을 제약받은 여자와 아이들이 민담의 주인공이 돼 모험과 활약을 펼치며 전사나 추장 부인으로 금의환향한다. 민족 기원신화인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 민족 대이동을 암시하는 ‘조상신과 은쿨룬클루’ 등이 <남아프리카 민담>(장용규 엮음)에 엮였다.

<태국·미얀마 민담>(김영애·최재현 엮음)은 힌두신이나 불교의 이야기에 민간신앙, 영웅담 등을 녹인 인도차이나 민담을 담았다. 주인공들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신들이 ‘와자싯’이라는 초월적 힘으로 도와준다. 신이 황금파리로 변해 누가 진짜 공주인지 일러주는 ‘낭 마노라’, 연인을 맺어주려 금·은 다리를 놓아주는 ‘우타이테위’ 등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원시신앙과 고유의 풍습을 보여주는 ‘마왕 보루타’ ‘트바르돕스키’를 비롯해 신의 은총으로 척박한 땅 대신 강한 영혼을 부여받았다는 자긍심을 보여주는 ‘포드할레의 전설’ 등은 폴란드의 대표적 민담이다. 이슬람 교리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는 ‘착한 일을 하면 후회하지 않는다’, 요술담 ‘황금 사과와 공작 아홉 마리’ 등은 유고슬라비아 민담을 대표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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