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뮤지컬 <최승희> 공연 앞둔 손진책·김성녀 부부가 말하는 ‘최승희와 안막’
극단 미추를 이끄는 우리 시대 연극인 김성녀(53), 손진책(56)씨는 27년 부부생활 동안 그 공존의 방법을 제시해왔다. 무대를 빛내는 배우로서, 또 배우가 빛나는 무대를 지휘해온 연출자로서 이들은 가족이기에 앞서 동지였다. 가풍이 엄한 경상도 8남매 가정에 맏며느리로 들어와 눈물콧물 쏟는 아내를 감싸주며 남편은 ‘따뜻한 엄마’ ‘착한 며느리’보다는 ‘좋은 배우’이길 먼저 원했다. 아내 역시 남편이 연출자로서의 자존심을 꺾지 않도록 집안 경제를 책임지느라 텔레비전 연속극, 라디오 성우, 음반 작업 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신작 <최승희>(9월26일~10월2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춤에 살고 춤에 죽은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뜯어보며 연극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려온 부부의 애환을 녹여낸다. ‘최승희’ 역을 맡은 김성녀씨와 ‘최승희’를 만들어낸 손진책씨. 밤 12시가 넘도록 연습실 불을 훤히 밝혀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홍중리 미추산방에서 <최승희>를 가다듬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 편집자
극단 미추에 10년째 몸담고 있는 정호붕(그는 극중에서 ‘이상적 코뮤니스트’인 김윤 역을 맡았다)씨는 자신이 막 입단했을 때도 극단 사무실에 최승희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기억한다. 10여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오면서도 손진책 대표의 마음속에는 늘 최승희가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왜 이토록 최승희를 놓지 못했을까?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남미에서조차 극찬을 받은 최승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계화된 선구적인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와 분단,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의 말년은 너무나 비참했죠. 폄하도 미화도 아닌 최승희의 인생 그 자체를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삼았던 선구적 무용가 최승희(1911~69)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던 14살 때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겠다며 현해탄을 건넌다. 이시이 밑에서 3년 동안 수학한 최승희는 서양춤 전공자로서 조선의 춤을 추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기생춤부터 초립동까지 조선 전통춤을 하나씩 배워나간다. 춤에 대한 열정에 더해 물기 머금은 버들가지처럼 하늘하늘한 몸매, 화사한 외모로 일본과 조선에서 스타가 된 최승희는 평생의 후원자 안막을 남편으로 맞으면서 세계로 비상을 시작한다.
“당대 ‘천재’라고 불렸던 안막은 본래 카프의 간부로 와세다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며 작가를 꿈꿨던 문학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승희 같은 무용가는 나오기 어렵지만 작가는 얼마든지 있으니 최승희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이시이 바쿠 선생의 충고를 받아들여 최승희를 위해 기획자, 연출자, 흥행사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최승희에게 무용의 길을 열어주었던 이시이 선생을 따라 자신의 이름도 ‘막’(漠)으로 바꾸죠.”
최승희를 통해 조선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건 조선무용을 재생시키기로 맘먹은 안막은 매니저로서 최승희를 철저하게 단련시킨다. 당시 안막이 최승희를 족쳐대는 모습을 본 어떤 이는 “마치 사냥꾼이 가마우지새를 훈련시켜 은어를 잡게 하는 것과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가마우지와 사냥꾼 모두 은어를 잡겠다는 목표가 뚜렷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마우지가 물고기 잡는 것을 즐긴다’는 사실이었다. 최승희는 냉정한 자세를 취하는 안막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고 맹연습에 전념한다. 이후 최승희와 안막은 1937년부터 40년까지 3년을 꼬박 미국과 유럽·남미를 돌며 세계적 무용가로서의 자리를 다지게 된다. 이 모두 안막이 뒤를 봐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승희-안막의 관계에 빗대어 김성녀씨와 손진책씨는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막’과 같은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아내는 남편의 지적인 자극에 힘입어 대학원까지 공부를 마쳤고, 남편은 아내가 무대에 올라 돈을 벌어왔기 때문에 ‘도 닦듯’ 연극을 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수십년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두 사람 모두 프로의 치열함이 없고선 불가능했다. 안막이 최승희를 족쳐댔던 것처럼, 지금도 이 부부는 서로 연극에 뜻이 안 맞을 땐 봐주는 법이 없다. 이번에 <최승희>를 만들 때도 손진책씨가 최승희의 유명한 ‘보살춤’을 다른 배우들에게 시키겠다고 하자 김성녀씨가 극 흐름에 맞지 않는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살도 빼고 나름대로 준비했는데 굳이 다른 사람에게 시킬 이유가 없잖아요. 30분 넘게 입씨름을 벌이다 결국 제가 직접 추기로 했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독일 출신 미술 담당 스태프는 ‘롱 타임 앵그리 신’이라고 코멘트를 날려 얼어붙은 연습실을 녹였다고 한다.
최승희와 안막의 인생은 해방 뒤 월북을 하면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식민시절 말기 군 위문공연에 나섰던 최승희의 이력이 남한에서 친일행위로 비판받자 일가족은 작은 쪽배에 몸을 싣고 북으로 간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던 안막이 해방 직전 중국 옌안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북의 간부들과 선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뒤 문화선정성 차관 등 요직에 올랐던 안막은 정파싸움에 희생돼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58년 실각한다. 자연히 최승희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김일성은 “우리 인민의 민족적 정서에 맞추어 우리 식대로 만들지 않고 서양식 무용극을 그대로 흉내내어 만들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사상 점검’의 회오리 속에 67년 ‘반당종파분자’로 숙청당하고 2년 뒤 사망한다. 어머니의 재주를 물려받아 ‘인민배우’ 칭호를 받으며 한껏 춤꾼의 기량을 펼치고 있던 딸 안성희도 이때 함께 숙청됐다고 한다. <최승희>의 극본을 쓴 작가 배삼식씨는 “일설에 따르면 안성희는 그 뒤 시골 농장에서 탈곡기를 돌리다 한쪽 손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며 최승희 일가의 비극을 전했다.
북에서 비극적 최후… 가슴에 그를 품고
“연극에서 최승희는 꿈결처럼 보낸 인생을 돌아보며 남편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춤과 나만 사랑하고 살아왔다’고. 최승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술가의 나르시즘이 현실에 부딪치며 어떤 무늬를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쌍의 지독한 일벌레로 불리는 손진책-김성녀 부부의 가슴 속에는 ‘최승희’와 ‘안막’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양주=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연극인 손진책 · 김성녀씨 부부에게서 안막 · 최승희의 ‘관계’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다.(김진수 기자)
세계를 무대로 삼았던 선구적 무용가 최승희(1911~69)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던 14살 때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겠다며 현해탄을 건넌다. 이시이 밑에서 3년 동안 수학한 최승희는 서양춤 전공자로서 조선의 춤을 추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기생춤부터 초립동까지 조선 전통춤을 하나씩 배워나간다. 춤에 대한 열정에 더해 물기 머금은 버들가지처럼 하늘하늘한 몸매, 화사한 외모로 일본과 조선에서 스타가 된 최승희는 평생의 후원자 안막을 남편으로 맞으면서 세계로 비상을 시작한다.


사진/ 1935년 이시이 바쿠 무용 연구소 시절의 안막 · 최승희 부부와 딸 승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