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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불가마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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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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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마에 놀러오세요.”

동네방네 소문낸 탓인지 시골에선 한밤중인 밤 10시, 야심함을 뚫고 도착한 가마터에는 10여명의 낯익기도 혹은 낯설기도 한 여성들이 모여들었다(여기까지 읽고 혹 불가마 사우나 이야기로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나라에 몇 안 남아 있다는 장작가마에 불을 때는 3~4일 동안, 도공인 은오씨는 축제판을 벌일 듯 사람들을 모아들인다. 우리가 간 날은 3일째, 문외한의 눈에도 불땀이 꽤 안정적으로 보인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가부장문화는 곳곳에서 여성을 터부시 하는 관습을 전통이라 여기게끔 만들었다. 가마터 역시 ‘여성 터부’가 심한 곳이지만 백수읍 길룡리에 위치한 원불교 성지 가마터만은 예외다. 장작 패고, 그릇 만들고, 가마 속에 쟁이고, 불 때고, 꺼내고, 또다시 손질하는 도공이 여성이니 가마터 또한 그의 지인인 여성들로 그득하다.

TV에선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하고 티끌만한 실수에도 아까운 도자기에 망치 세례를 하는 장면만 봐온 나로선 가마터 앞 여성들의 작은 잔치놀이가 기쁘고 재미있다.

모인 사람들도 4살짜리 은서부터 수녀님, 교무님까지, 사는 곳도 서울부터 목포, 광주, 영광 등 다양하다.

둘째아들도 촛대그릇 하나 빚어놓은지라 주인공처럼 졸음 겨운 눈 비비며 가마터를 지킨다.


10여명의 가마터 구경꾼들은 통닭이며 과일이며 제각각의 간식거리들을 챙겨 먹으며 일상의 이야기에 열을 내다가도 장작이 재로 스러져버린 빈 공간이 생기면 장작 한 개비씩 집어넣겠다고 벌떡벌떡 자리를 박찬다.

불 때는 24시간 동안 꼬박 가마터를 지켜야 한다. 특히 밤에 불조절을 잘해야 하기 때문에 밤새우기 일쑤라더니 가마터 앞 평상에는 이불과 모기향이 제자리를 잡고 있다. 두세달에 한번씩 그릇을 구울 때마다 출산과 같은 산고를 치른다는 은오 도공은 늦은 밤까지 친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도 즐거움에 달떠보인다.

“일반 서민들이 부담 갖지 않고 쓸 수 있는 생활자기를 만들고 싶어요. 버리긴 왜 버려요? 깨진 대로 굽은 대로 다 소용이 있어요.” 못 쓰게 된 것 하나라도 얻고 싶은 마음으로 어슬렁대던 발걸음들이 도공의 알뜰살뜰한 도자기 철학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여성들이 우글거려도 우리 가마에선 90% 이상 성공해요. 불 때는 건 정성과 기술이지 미신이 아니잖아요”라며 가마터 ‘여성 터부’를 일축한다.

오늘 새벽 가마터 옆구리 구멍에 불을 때는 장면이 장관이라는 말에 아쉬움 달래며 밤 12시까지 뭉치다가 잠든 아들놈 들쳐없고 집으로 철수할 수밖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접근 금지당했던 금녀의 땅 가마터에서의 밤유희가 독특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한결 느긋해진 마음까지 덤으로 얻어오니 가을밤 귀뚜리 소리는 왜 이리 큰지!

그릇 꺼내고 나면 가마터가 그대로 황토 찜질방이 된다는 말에 3일 뒤 땀복 챙겨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가을 밤길을 빠져나온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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