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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백지 시집/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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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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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워낙 없이 살아서인지 선물을 주는 데 참 인색하다. 주는 데 그러하다보니 생일 등의 선물을 받는 것 자체도 어색하다. 나도 모르게 외적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더해져 서서히 습관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리 모양새가 좋은 것은 아니다. 차라리 속으로 끙끙 앓을지언정 물건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왠지 쑥스러웠다.

없을 무!… 잊지 못할 선물공책

한심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내성적이었으니, 외적인 표현은 고사하고 두고두고 속으로 다진 고백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덤 속까지 가져가야 할 무슨 엄청난 비밀도 아닌데 늘 지난 뒤에 후회하곤 했다. 선물 이전에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번 제대로 못하고 사는 어쩌면 여전히 골수 ‘경상도 보리 문둥이’인 것일까. 입 밖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 사랑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으로 속으로만 누르고 있으니 이 어찌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나이가 들면서 반성도 많이 하지만, 여전히 지금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냉가슴만 치다가 죽기 전에 간신히 유언처럼 토로해야 할 것만 같은 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 이우만

그러나 명색이 시인이어서 그런지 선물 중에 책 선물에 대해서는 참으로 관대한 편이다. 책을 주는 것이나 받는 것, 모두 마음 환한 것이었다. 내가 받은 책 선물 중에 잊지 못할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의 공책이다.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표지에 큰 글씨로 없을 무(無)자 하나 금박으로 달랑 쓰여 있는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 하드 커버로 된 이 책 아닌 책은 꽤나 두꺼웠는데, 펼쳐보면 황무지처럼 휭하니 먼지 바람이 이는 백지였다. 이른바 아무런 글씨도 없는 공책이었는데, 깨알처럼 글씨가 박혀 있는 책들보다 더 가슴 설레는 것이었다.


그 책의 첫장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망설이던 시절이 바로 나의 10대 후반이었다. 텅 빈 백지는 언제나 두렵고도 설레는 신대륙 같은 것. 나는 차마 그 백지에 시 한편, 연서 한번은 고사하고 이름 하나 쓰지 못한 채 아끼고 아끼면서 간직만 하다가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험난한 20대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지를 보면 막막해진다.

시를 쓸 때에도 백지에는 못 쓰고 꼭 달력 뒷장이나 이면지 같은 데 쓰는데, 이것도 그 어린 시절 없을 무자의 공책에서 받은 콤플렉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나는 백지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고 작아진다.

또 하나 선물로 받은 책 중에 잊지 못할 것은 최근에 받은 수필집 한권이다. <근원수필>이라는 범우문고의 아주 작은 책인데, 실상사 수월암의 연관 스님에게 받은 것이다. 이 책의 내지에 스님이 사인을 했는데, 소박하게도 ‘내가 젤 좋아하는 책’이라고 쓰여 있다. 스님이 무척 아끼는 이 책의 필자 김용준은 화가이자 수필가인데, 1930년대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상허 이태준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정지용 시인과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서울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바 있는 그는 이태준 등과 함께 서울 수복 때 월북을 했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호는 책의 제목인 근원과 겸려, 노시산방주인 등이다.

스님이 선물해 준 <근원수필>

<근원수필>은 그야말로 진솔하고 소박한 생활글이다. 그러나 이 수필집은 요즘의 쏟아지는 산문집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체험을 바탕으로, 한편 한편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살아 있다. 사람이 있고 생활이 있고 유머와 애수가 있으며, 날카로운 비판이 들어 있다. 그리고 ‘최북과 임희지’ ‘오원일사’ 등 흥미로운 미술사적 일화나 해박한 전문적 소론 또한 진한 흥취를 돋우게 한다. 이 책의 후기에는 ‘남에게 해만은 끼치지 않을 테니 나를 자유스럽게 해달라, 밤낮으로 기원하는 것이 이것이었건만 이 조그만 자유조차 나에게는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쓰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한 지식인의 고뇌가 페부 깊숙이 다가온다.

이 가을에 근원의 수필을 음미하며, 행간의 여백을 읽는데 자꾸 없을 무자 공책이 떠오른다.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펴내야 할 시집이 있다면 바로 이처럼 텅 빈 책, 백지 시집이 아니겠는가.

이원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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