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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방송] ‘폐인’의 힘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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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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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문화현상을 이끈 드라마 마니아 집단… <거짓말> 이후 열광적 시청자로 제작에도 기여

다모폐인: <다모>(茶母)를 너무나 좋아하는 나머지 식음전폐 및 다모에 대한 환상, 주변인들에게 다모를 보라는 무의식적인 추천 등 일상적인 생활형태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다모 게시판에서 떠날 줄을 모르며 ‘~하오’ ‘~했소’ 등 ‘다모체’ 어투를 사용함. 원래는 ‘사람됨을 포기한다’의 뜻으로 폐할 폐(廢)자를 쓰는 것이 보통이나, 이들에게 다모는 워낙 사랑의 개념이 지배적이어서 사랑할 폐(嬖)자를 사용한다.

‘다모폐인’은 이제 더 이상 생경한 신조어가 아니다.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다모>가 방영을 시작했을 때 폭발적인 호응을 보였던 이들은 그저 하나의 드라마 마니아 집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회를 거듭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은 갖가지 진기록들을 만들어내며 오히려 드라마 자체보다 더 화제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

시청자 게시판 100만건 돌파의 의미


다모폐인들이 만들어낸 성과는 국내 드라마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지난 7일 밤에는 방송사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게시물 수가 100만건을 돌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년 넘게 방송되면서 안티세력까지 형성되어 찬반 논쟁이 후끈 달아올랐던 <인어아가씨>의 게시물 수는 삭제된 것까지 합쳐 20여만건이었다. 또한 올해의 화제작이었던 <올인>과 <옥탑방 고양이>도 각각 6만7천여건, 3만4천여건에 그쳤다. 다모폐인들이 얼마나 광적인 지지를 보냈는지 알 수 있다. 100만 돌파 이후에는 다모폐인들의 ‘감축’ 게시물 때문에 방송사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다모폐인들이 ‘서버의 난’이라 부르는 접속 과부하로 인한 서버 마비 사태는 <다모> 방영 내내 수시로 일어났고 이에 방송사쪽에서는 서버를 증설하기도 했다. VOD(다시보기) 서비스 이용 건수 또한 40만건에 달해 iMBC 유료화 이후 최다를 기록했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금까지도 게시판과 VOD 이용 건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사진/ 다모폐인들은 드라마 마니아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다모> 제작진의 한계를 메워주는 구실도 했다.
다모폐인들은 수치상의 신기록뿐 아니라 새로운 드라마 마니아 문화도 만들어냈다. 이들은 단순히 드라마를 보고 시청소감을 남기는 형태로 피드백을 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한성 좌포청 신보’ ‘다모일보’ ‘다모폐인일보’ 등 <다모>를 소재로 한 가상 인터넷신문들이 만들어졌고 <다모>의 내용을 토대로 만든 ‘다모도감’도 선보였다. 다모 전용 브라우저인 ‘다모우저’를 만들어 보급한 팬이 있는가 하면 ‘다모방송’(다방)의 DJ는 다모폐인들 사이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다모> 제작이 시작된 지난 1월 개설되어 현재 20만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최대의 <다모> 팬카페에서는 드라마로 방영된 내용을 넘어 주인공들의 삶을 재구성한 외전도 볼 수 있다.

특정 드라마에 대한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가시화된 것은 1997년 방영된 <거짓말>이 시작이었다. 당시 <거짓말>의 시청률은 극히 낮았으나 노희경 작가의 가슴을 저미는 문학적인 대사에 매료된 시청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독자적인 홈페이지를 만들고 드라마 종영 뒤에도 정기적으로 상영회를 갖는 등 단순한 드라마 시청자의 태도를 넘어서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마니아 드라마’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진/ 노희경 작가의 <거짓말>(1997)은 마니아 드라마의 효시로 꼽힌다.
인터넷이 본격화되면서 마니아 드라마는 계속 줄을 이었다. 시청률이라는 수치로 드라마의 가치가 모두 평가되던 이전과 달리,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보여지는 시청자들의 평가와 반응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시청률은 비록 높지 않더라도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소수의 열성적인 팬을 만들어내는 드라마들이 마니아 드라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마니아 드라마에 대한 평가가 높아져도 그것은 극히 일부 계층이 향유하는 문화로 치부되었다. 더 많은 대중에게 공감을 얻어야 하는 것이 드라마의 태생적 과제이기 때문에 마니아 드라마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파급력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틀을 깬 것이 지난해 화제를 모았던 <네 멋대로 해라>다. 젊은 세대에게 열광적 지지를 얻었던 이 드라마 또한 초반에는 저조한 시청률로 인해 일부 시청자들만이 호응하는 드라마라고 평가절하되었다. 그러나 <네 멋대로 해라>는 캐릭터 설정과 내용전개에서 그동안 시청자들에게 익숙했던 드라마 문법을 모두 깨뜨리며 신선하고 파격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줬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번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던 1990년대 이후 젊은 청춘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모습을 현실에 발딛고 선 생생한 캐릭터로 드러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시청률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한국 드라마사에 새로운 지표가 될 작품이라는 평가까지 얻게 되었다.

사진/ <네 멋대로 해라>(2002)는 드라마의 전통적 문법을 깨뜨리며 마니아 층을 형성했다.

<다모>는 제작진과 ‘폐인’이 만든 드라마

<다모>에 이르러 마니아 드라마의 힘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모> 팬덤의 규모는 이전 그 어떤 드라마와도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다모> 마니아, 즉 다모폐인들은 <다모>를 일개 드라마가 아닌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다모>를 연출한 이재규 PD는 “다모폐인들이 아니었으면 <다모>의 가치가 이렇게 높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다모>는 제작진의 손을 떠났다. 다모폐인들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다모폐인들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다모>는 제작진이 만들어낸 것 이상의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다모>는 HD로 사전제작하고 화려한 액션신으로 비주얼 면에서 완성도를 높인 것 못지않게 스토리에 많은 공을 들인 드라마다. 최근 코미디 코드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모>는 보기 드물게 내용이 무겁고 행간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대사도 함축적이고 비약적이다. 드라마에서 표현되지 않은 여백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다모폐인들의 역할이었다. 한 다모폐인은 “극중 상황이나 주인공들의 심리, 대사가 이해 안 될 때도 많았지만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다 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었다”고 말했다. 드라마가 종영된 지금도 다모폐인들 사이에서는 <다모>를 이해하기 위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관비라는 천한 신분인 채옥(하지원)에게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이서진)과 화적패의 두령 장성백(김민준)을 향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혁명가로서 장성백의 캐릭터가 설득력을 잃지는 않았는지 등에 대해 각 인물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마치 실존인물을 분석하듯 진지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이렇게 다모폐인들은 <다모>를 통해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에서 드라마 <다모>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방송의 여백을 메운 ‘폐인’들의 활약상

방송사 내부에서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다모>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넓은 마니아층의 형성으로 결국 성공한 드라마로 기록되게 되었다. ‘젊은 사극’이라는 모토에 맞는 시청타깃인 20, 30대의 감성을 정확하게 파고든 것이 주요한 요인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는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재규 PD는 “누구나 보고 좋아하는 무난한 드라마만 만들어진다면 드라마 발전은 없을 것이다. 특정 시청타깃을 정해놓으면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신선하고 다양한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다. 드라마의 성공과 실패를 예상하는 방송사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잣대가 흔들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다모>로 인해, 다모폐인으로 인해 드라마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고 있는 셈이다.

피소현 기자 | 한겨레 스카이라이프부 plav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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