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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들의 ‘표현’은 위험하다/ 전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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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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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 하는 예컨대 | 표현의 자유는 제한할 수 있나]

전해준/ 인하대 사범대학 부속고 2학년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거나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이것이 국어사전에 명시돼 있는 ‘자유’의 정의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 가지 않아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공도동망(共倒同亡)에 이르게 되고 말 것이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법을 비롯한 각종 사회규범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자유라는 것은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 2003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보여준 반북 세력들의 시위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단순히 자신들의 의견 표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의 피해를 가져다주는 행위이다. 이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위를 했어야 한다. 더구나 이들이 택한 시기는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라는 국가적 위상이 걸린 큰 대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부정적인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시위가 국가적 이미지의 실추를 유발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런 행위는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다. 금강산관광 사업, 개성공단 조성 등 남북경협이 진행되고 있으며, 베이징 6자회담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개최되는 등 남북간 화합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전 세계적인 노력이 펼쳐지는 마당에 반북 시위를, 다른 때도 아니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기간에 벌였다는 것은 화해의 조류에 역행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는 ‘국가’에 피해를 끼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에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한번 더 양보해서, 이들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은 합리적인 것일까? “사회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알베르 카뮈의 발언 이후 프랑스 사회에서는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라는 명제가 끊임없이 화두로 등장한다고 한다. 이는 공화국으로서의 프랑스 사회의 특성을 다른 어떤 말보다 잘 드러낸다.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감이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프랑스에서는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하면 시민들이 불평을 쏟아내기는커녕 지지하고 격려해준다고 한다. 이같은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감은 프랑스 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정의’가 사회 곳곳에 널리 퍼진 프랑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이번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반북세력이 보여준 행위는 ‘사회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들이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김정일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김정일 타도하여 북한주민 구출하자’ 따위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타당한 논거가 없다. 또 이것은 ‘흡수통일’에 다름 아니다. 단순히 김정일 국방위원장만 사라지면 북한 주민들이 ‘구출’되는 것인가? 북한 주민들은 그들 나름의 사상과 이념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만큼, 지금 당장 그들의 사상 및 이념을 억압할 수는 없다. 시간을 두고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해가면서 민족간의 동질감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런 행위는 ‘사회정의’로 규정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사회악(惡)’에 다름 아니다.

집회 시작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에 ‘옥외집회신고서’만 제출하면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집회나 시위를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가 예전에 비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의사를 ‘표현’하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권리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민주운동가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진 결실이다. 이처럼 소중한 권리를 악용하는 사태가 잦아지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까움이 앞선다. 이런 소중한 권리를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을 통해서 향유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 사회에도 사회정의가 꽃필 수 있을 것이다.

칭찬과 아쉬움

‘표현의 자유’의 경계는 이미 그어진 선이 아니다. 그 경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넓어져 왔다. 그 자유의 경계는 사회세력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에 따라 춤추는 포물선인 것이다. 보수단체의 반북 기자회견과 한총련의 미군 훈련장 진입 시위를 예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한계를 묻는 ‘예컨대’ 논술은 그만큼 논쟁적인 주제였다. 이 뜨거운 주제를 놓고 학생들도 고전한 듯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동체, 즉 사회와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표현의 자유는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특히 보수단체의 반북 시위에 대해서는 논리적 근거도 없이 공공선(남북화해 또는 통일)을 해치는 부정적 행위로 보고, 이들의 행위를 자유를 넘어선 방종으로 비판했다. 한총련 시위에 대한 판단은 엇갈렸다.

이번 주 논술로 뽑힌 인하대 부속고 전해준 학생의 글은 논리의 치밀성이 돋보였다. 전해준 학생의 글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로 설정하면서 서두를 열었다. 이에 비춰 반북세력의 시위가 남북화해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 그는 표현의 내용으로 들어가 ‘사회정의’를 해칠 때 관용의 한계에 부딪힌다는 주장을 폈다. ‘김정일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등 반북 기자회견의 내용이 관용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음을 예로 들었다. 마지막으로 표현의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름을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맺었다.

또 전해준 학생의 글은 다른 학생들의 글에 견줘 ‘예컨대’에서 뛰어났다. 즉, 논리를 뒷받침하는 구체성이 가장 앞선 것이다. 다른 학생들이 반북 기자회견이 관용의 범위에서 벗어났음을 주장했을 뿐 그 구체적 내용을 살피지 않은 반면, 전해준 학생은 반북 기자회견의 내용을 꼼꼼히 짚어가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전해준 학생의 글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주제문에서 예로 든 한총련 시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총련 시위에 대한 판단이 어려웠다면, 그 모호함에 대해서라도 나름의 논리를 구성했어야 옳다. 흑백논리가 아닌 회색지대의 논리도 있는 법이다. 또한 과거 앵똘레랑스(불관용)을 조장해온 보수세력이 이제는 그 얼굴을 바꿔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똘레랑스(관용)를 요구한다는 비판도 빠져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단정적인 몇몇 귀절도 글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예를 들어 서론 부분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같은 귀절은 강변하는 글이지, 설득하는 글투가 아니다.

논쟁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방종을 가르는 원칙을 몇 가지 알아두고 넘어가자.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다른 의견의 자유다. 기득권층 혹은 다수의 견해와 다른 소수의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보장될 때 그 사회는 비로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내용이 타인에 대한 비방이거나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일 때 표현의 자유는 제약된다. 또한 그 표현 방법의 폭력성 여부도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더 급진적인 입장에서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공공선의 명분으로 표현을 제약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본다. 전해준 학생의 글에 인용된 “사회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용기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기본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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