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책 읽어주는 여자/ 이원규

476
등록 : 2003-09-17 00:00 수정 :

크게 작게

<책 읽어주는 여자>(글쓴이 레이몽 장)라는 소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고 보았으니, 그것이 바로 몬트리올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프랑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감독 미셸 드빌)다. 정교한 촬영으로 여성과 언어의 관계를 잘 묘사한 이 영화는 약간의 누드 신이 삽화처럼 들어간 ‘어른을 위한 동화’다. 마리와 콩스탕스의 1인 2역을 맡은 미유 미유의 매력적인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가장 전염성이 강한 ‘책’

콩스탕스는 남편에게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소설을 읽어준다. 소설 속의 주인공 마리는 신문에 ‘젊은 여인이 책을 읽어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내고 다섯명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게 된다. 그녀의 고객은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하반신 불구의 소년과, 누군가를 흠모하는 폴란드 백작부인, 외로운 중년 남자 등이다. 고객의 요구대로 수동적으로 책을 읽어주던 마리는 차츰 스스로 고객을 고른 뒤 자신의 의지대로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책을 다 읽어준 콩스탕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일러스트레이션 | 이우만
내가 새삼스럽게 이 영화를 거론하는 것은 바로 책을 읽어주는 여자의 그 ‘얼굴’ 때문이다. 책을 읽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여자든 남자든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요즘 어린 자식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부모말고 누가 책을 읽어주겠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가끔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습관이 있다. 대화할 때도 나는 주로 경청의 자세를 취하는데, 이는 책을 읽거나 얘기를 듣는 것보다 사람의 얼굴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책은 이따금 오독을 하더라도 당장은 뒤탈이 없지만, 상대의 얼굴을 오독해서는 곧바로 곤란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책보다 읽어내기가 힘든 것이 바로 사람의 얼굴 아닌가.


어떤 이는 나의 얼굴에서 눈물을 읽고, 어떤 이는 나의 얼굴에서 역마살의 바람을 읽고, 어떤 이는 또 봄날의 푸른 산기운을 읽기도 한다. 그러면 나도 어느새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얼굴이라는 백과사전 한권씩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하루 그 분량을 늘려가는, 말하자면 수시로 업그레이드되는 인생이라는 백과사전 말이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사주 관상을 그리 믿는 것은 아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선험적 코드가 엿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잘나고 못난 것의 차이가 아니다. 얼굴에 편안함이 깃들어 있으면 그 사람이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편하게 느껴지고, 아무리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일지라도 자주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면 그것으로 그 날카로움은 상쇄된다. 얼굴이라는 책은 그만큼 전염성이 강하다.

오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그의 눈짓 하나하나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독해는 그의 말 이전에 얼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풍경이나 미래마저 그의 얼굴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어려운 독서를 하고 있다.

옆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이따금 그 얼굴을 벗겨보면 또 다른 표정이 도사리고 있다. 얼굴이 곧 가면이고 가면이 곧 얼굴일 때 누군들 당황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중층구조의 얼굴을 잘 읽지 못해 우리는 자주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얼굴이라는 텍스트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짓의 풍경은 사실 들어설 자리가 없다. 되새김질하며 읽기도 전에 그만 선입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뿐이다. 우리가 책의 제목만 보고 단정해버리거나 마치 다 읽은 것처럼 착각하기도 하는데, 얼굴을 읽는 법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따금 지치고 지칠 때 시를 읽어주는 여자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얼굴을 보고 싶다. 그녀가 읽는 시집보다 그 여자의 얼굴이라는 책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싶다. 우리 모두 읽던 책을 집어던지자. 그리고 옆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바로 그 얼굴 속에 함께 가야 할 ‘오래된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원규 | 시인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