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 전성시대 맞는 한국영화계… ‘덩치’들의 승부, 보는 재미 만큼 위험도 있네
요즘 한국영화 홍보문구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바로 블록버스터라는 단어다. ‘미스터리 휴먼 블록버스터’(<공동경비구역 JSA>), ‘한국 최초의 파이어액션 블록버스터’(<싸이렌>), ‘더 파이어 블록버스터’(<리베라 메>) 등이 그런 예다. 모두 근래에 개봉했거나 곧 개봉할 영화들이다.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는 피해갔지만, ‘판타지 로망 대서사시’(<단적비연수>)도 마케팅 컨셉트는 비슷하다. 흔히 대작영화로 번역되는 ‘블록버스터’는 명확한 정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통용되는 뉘앙스를 기준으로 하면 ‘돈 많이 들여 볼거리 많고 광고도 엄청 많이 해 흥행 성공률이 매우 높은 영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한마디로 모든 면에서 ‘큰 영화’다.
블록버스터라는 단어의 등장빈도에서 짐작되듯, 이제 한국영화계도 크기 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다. 앞서 등장한 영화들은 모두 40억원을 넘나드는 제작비를 쏟아부었다. 중국에서 촬영중인 <무사>의 제작비는 50억원에 육박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용어를 제일 먼저 쓴 <퇴마록>의 순제작비는 불과 15억원 정도였다. 2년 만에 최대제작비 수준이 2배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게다가 1년에 한편 나올까말까 하던 대작이 이번 가을에만 3∼4편 무더기 개봉할 정도로 쏟아져나오고 있다. 제작비 35억원의 <공동경비구역 JSA>가 채 막을 내리기도 전인 10월28일 <싸이렌>이 개봉한 데 이어, 11월11일에는 <단적비연수>와 <리베라 메>라는 초중량급 영화들이 정면 충돌한다.
마케팅엔 아낌없이 쓴다
물론 반짝 경기만은 아니다. 흥행도박사라면 큰돈을 걸 만한 <무사>는 내년 2월 개봉예정이며, SF액션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2019 로스트 메모리즈>도 일찌감치 기획돼 제작준비에 들어가 있다. 이외에도 시네마서비스, 싸이더스, 강제규필름 등 흥행성적이 우수하고 신뢰도가 높은 제작사들은 외국과의 합작을 통한 더욱 거대한 프로젝트를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다. 그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적도 좋았으니, 이쯤 되면 앞으로는 한국영화계도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에 꿀리지 않는 동급 선수를 출전시킬 수 있겠다 싶은 희망을 품을 만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블록버스터 다산은 한국 영화산업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나타내는 징표다. 여기엔 희망만큼 위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블록버스터의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블록버스터가 영화사에서 비중있는 단어로 등장한 건 할리우드가 TV의 도전과 미디어환경의 급변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70년대 중반, 정확히 말하면 <조스> 이후다. 자신감을 상실해가던 할리우드는 <조스>에서 영화의 상품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범답안을 발견했다. <조스>는 영화를 거대한 이벤트상품으로 만들었다. 치밀하고 대대적인 사전 마케팅, 캐릭터상품·게임·테마파크 등 연관상품 개발, TV가 쫓아올 수 없는 장대한 스펙터클과 모든 연령층의 관객이 넋놓고 즐길 수 있는 단순하고도 빠른 속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한마디로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크기와 속도의 구경거리를 무기로 삼는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말 그대로 이 전략의 한국적 적용이다. 제작비 규모에서 맞설 처지는 못 되지만, 최근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한국영화들은 할리우드의 수법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무엇보다 스펙터클과 속도감을 결합한 장르 전략에서 그러하다. <싸이렌>과 <리베라 메>가 불과의 싸움이라는 소재를 택한 건 결코 난데없는 일이 아니다. <단적비연수>는 판타지라는 장르적 이점에 기대 관객의 얼을 쏙 빼놓을 만한 비주얼을 선보이겠다는 야심을 내비치고 있다. 영화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케팅에, 3년 전만 해도 영화 한편을 만들고도 남았을 거액인 10억원 안팎을 퍼붓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순제작비 24억원을 쓴 <쉬리>가 마케팅에만 12억원을 아낌없이 던져넣은 것도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 첫주 개봉관을 30개관 안팎으로 잡는 몰아치기 전략의 원조도 할리우드다. 손익분기점 80만명, 한방에 망할수도
그렇다고 이 모든 게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엔 몇 가지 암초가 있다. 무엇보다 시장규모의 한계가 있다. 예컨대 <단적비연수>와 <리베라 메>는 서울 관객 80만명을 돌파해야 적자를 면한다. 서울 관객 60만명이 대박 기준선이고 100만명은 신의 경지라는 충무로의 속설대로라면 적어도 신이 반쯤은 손을 들어줘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작비 규모는 위태로운 점이 있다. 블록버스터 전략은 크게 써서 왕창 벌자는 노선인데, 아직 제작 투자가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충무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삐끗하면 한방에 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난제의 출구는 현재 해외시장 개척밖에 없다. 충무로 제작자들이 합작에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건 합작 자체가 합작 대상국의 시장을 미리 확보하는 방책이기도 한 때문이다. 이쪽은 전망이 어두운 편이 아니다. 홍콩과 일본이 동아시아 시장에서 주춤하는 사이, 한국 제작자들의 기획능력이 비약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쉬리>가 일본에서 1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것이나, <8월의 크리스마스> <텔미썸딩> <반칙왕> 같은 영화가 동아시아 곳곳에서 높은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는 데서도 증명된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대작화 경향의 가장 큰 그늘은, 문화로서의 영화가 설 자리를 좁힌다는 데 있다. 예술이라면 목소리 높이는 사람이 즐비한데도 우리의 영화문화엔 예술로서의 영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최근 맹아가 싹트긴 했지만 아직 든든한 시네마테크 하나 없으며, 영화학계도 변변한 한국영화사 하나 못 내놓을 정도로 초보단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하나의 이벤트요 멀티미디어 상품의 한축 정도로 간주하는 블록버스터 마인드가 압도하다면, 영화의 정신사적 가치는 점점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해도 대작들이 육탄전을 벌이는 가을 극장가의 대전은 외면하기 힘들 만큼 흥미진진하다. 영화 관객의 대다수는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대중영화의 시장 승부가 보여주는 긴박감에 매혹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결국 최고의 챔피언은 헤비급에서 나온다. 그게 어쩔 수 없는 블록버스터의 힘이다.
허문영 기자/ 한겨레 씨네21부

(사진/영화 <싸이렌>.)
물론 반짝 경기만은 아니다. 흥행도박사라면 큰돈을 걸 만한 <무사>는 내년 2월 개봉예정이며, SF액션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2019 로스트 메모리즈>도 일찌감치 기획돼 제작준비에 들어가 있다. 이외에도 시네마서비스, 싸이더스, 강제규필름 등 흥행성적이 우수하고 신뢰도가 높은 제작사들은 외국과의 합작을 통한 더욱 거대한 프로젝트를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다. 그간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적도 좋았으니, 이쯤 되면 앞으로는 한국영화계도 할리우드산 블록버스터에 꿀리지 않는 동급 선수를 출전시킬 수 있겠다 싶은 희망을 품을 만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블록버스터 다산은 한국 영화산업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나타내는 징표다. 여기엔 희망만큼 위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블록버스터의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블록버스터가 영화사에서 비중있는 단어로 등장한 건 할리우드가 TV의 도전과 미디어환경의 급변으로 위기에 빠져 있던 70년대 중반, 정확히 말하면 <조스> 이후다. 자신감을 상실해가던 할리우드는 <조스>에서 영화의 상품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범답안을 발견했다. <조스>는 영화를 거대한 이벤트상품으로 만들었다. 치밀하고 대대적인 사전 마케팅, 캐릭터상품·게임·테마파크 등 연관상품 개발, TV가 쫓아올 수 없는 장대한 스펙터클과 모든 연령층의 관객이 넋놓고 즐길 수 있는 단순하고도 빠른 속도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한마디로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크기와 속도의 구경거리를 무기로 삼는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말 그대로 이 전략의 한국적 적용이다. 제작비 규모에서 맞설 처지는 못 되지만, 최근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한국영화들은 할리우드의 수법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다. 무엇보다 스펙터클과 속도감을 결합한 장르 전략에서 그러하다. <싸이렌>과 <리베라 메>가 불과의 싸움이라는 소재를 택한 건 결코 난데없는 일이 아니다. <단적비연수>는 판타지라는 장르적 이점에 기대 관객의 얼을 쏙 빼놓을 만한 비주얼을 선보이겠다는 야심을 내비치고 있다. 영화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케팅에, 3년 전만 해도 영화 한편을 만들고도 남았을 거액인 10억원 안팎을 퍼붓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순제작비 24억원을 쓴 <쉬리>가 마케팅에만 12억원을 아낌없이 던져넣은 것도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 첫주 개봉관을 30개관 안팎으로 잡는 몰아치기 전략의 원조도 할리우드다. 손익분기점 80만명, 한방에 망할수도

(사진/영화 <퇴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