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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도로 옆 콩밭에도 역사의 숨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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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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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저 너머, 우리 도자의 중요 유적을 한몸에 묻고 있는 경기도 광주를 가다

불과 흙과 혼의 땅. 제2회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10월30일까지)가 열리는 경기도 광주·이천·여주는 예로부터 도자 문화가 성했던 땅이다. 광주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임금의 식사와 대궐 연회에 쓰이는 음식을 관장하는 왕실기구인 사옹원의 분원이 설치돼 왕실과 관청에서 쓸 그릇을 생산했다. 이곳에서 발견된 가마터만 해도 300여곳이 넘고 일부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그런가 하면 여주는 조선시대부터 질 높은 백자를 많이 구워냈고 그 맥을 이어 행남자기 같은 유명기업과 소규모 생활자기공방이 몰려 있다. 이천은 ‘청자의 달인’이랄 수 있는 해강 유근영 선생이 해방 직후 머물며 제자들을 키워내 수십년 만에 작가들의 산실로 거듭났다. 이번 비엔날레 행사 콘셉트를 ‘전통의 격조, 생활의 향기, 창조의 열정’이라 정한 것도 각각 광주·여주·이천의 역사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이다.

화려한 비엔날레 행사 저 너머, 우리 도자 역사의 중요 유적을 한몸에 묻고 있는 있는 땅, 광주를 찾았다. 이번 답사엔 최건 조선관요박물관장과 함께해 귀중한 도움말을 얻었다. 편집자


8월28일 오전 광주로 가는 길은 마음이 편했다. 새벽까지 내리던 궂은비 때문에 맘을 졸였던 터에 아침이 되자 청명한 하늘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렇게 비온 뒤 땅이 패고 흙이 뒤집힌 경우엔 유물이 더 잘 보인다”며 최건 관장은 반겼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분원이 있었던 광주는 마을 곳곳이 가마터다. “우리 전통 가마는 경사가 완만한, 사람 살기 좋은 산자락 기슭에 굴을 파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마터 자리에 마을이 들어앉아 보존에 애를 먹습니다.” 최 관장은 먼저 식당과 각종 상점이 즐비한 우산리로 안내했다.


천주교인들의 성지, 도자의 성지

우산리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천주교 천진암 대성당터는 100년 동안 성전을 건립한다는 계획으로 10여년 전부터 터를 닦아놓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친히 다녀간 곳으로 천주교인들에게는 성스러움의 의미가 더 각별해졌지만 도예인들에게도 이곳은 역시 도자의 성지나 마찬가지다. 15세기 전반기에 분원이 자리잡았던 이곳엔 조선 전기 유행했던 상감 백자를 비롯해 청자 조각이 출토됐다.

사진/ 우산리가마터에서 최건 조선관요박물관장이 도자 파편을 들고 가마터 역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대성당터 들머리 도로 옆 콩밭에 들어가보니 흑백상감 문양이 또렷한 백자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가마터에서 백자를 구울 때 그 겉을 둘러쌌던 내화갑 조각도 보였다. 이곳에선 ‘내용’(內用·내명부에서 쓴다는 뜻), ‘왕’(王) 등의 글자가 적힌 그릇이 출토돼 고급 왕실 도자기를 생산하던 곳이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최 관장은 파편의 단면을 보여주며 “조직이 치밀하고 파편의 색깔이 순도가 높아 질 높은 자기그릇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진 자기는 그 쓸모와 아름다움을 “돌의 견결함과 유리의 매끄러움, 옥의 청결함”에 비할 정도다. 최 관장은 “자기는 물기를 전혀 흡수하지 않아 인류 최고의 깨끗한 용기”라고 덧붙였다. 1990년대 초 천진암 대성당으로 통하는 도로를 닦느라 땅을 파헤치니 도자기 파편이 수없이 나와 눈처럼 하얗게 쌓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유적의 중요성과는 아랑곳없이 성당 터닦기 공사는 강행됐고, 길도 넓혀졌다. 3년 전까지도 가마터 자리에 별장의 신축 허가가 버젓이 나왔을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광주에 왕실 직영 도자 공장이 들어선 것은 이곳이 우수한 도자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췄고 한양과 가까운데다 좋은 흙이 풍부하고 무갑산·앵자봉 등 숲이 무성해 번목(가마를 때는 장작)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전국 139곳의 자기소 중에서 상품(上品)을 만든 곳은 경상도 상주에 2곳, 고령에 1곳, 경기도 광주에 1곳밖에 없었다. 실력이 뛰어난 도공이 많았던 광주는 특히 강이 가까워 완성품을 배에 실어 쉽게 궁궐에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분원은 가마를 벌여놓고 10년쯤 지나면 근처 나무가 고갈되기 때문에 새 숲을 찾아 10년 단위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18세기 들어 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강원도에서 땔감을 실어나르게 되면서 분원을 한곳에서 오랫동안 경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상상 초월하는 보존에 대한 무지

땔감 조달이 편리해지면서 분원이 최종 정착한 곳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이곳은 지금도 마을 이름이 ‘분원리’로 불리고 있다. 1752년부터 1883년 민영화 되기까지 130년 동안 왕실·관청 사기 공장이었던 이곳은 20세기 들어 왜사기가 유행하면서 그 많던 가마터들도 죄다 문을 닫았다. 1920년 학교가 세워진 뒤 현재 분원초등학교가 들어선 분원리 가마터는 2만평 일대에 백자·청화 백자 파편들이 묻혀 있다. 1996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당시 아시아 문명권 최고가인 824만달러에 팔린 ‘철화백자용문호’ 같은 명품들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분원초등학교 입구엔 파편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곳에 ‘사적비’를 세우고 혹 훼손될 것을 염려해 파란 비닐 장막을 덮어놓았다. 아무런 조치도 안 취한 것보다는 낫지만 마치 공사가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주어 눈에 거슬린다.

사진/ 광주 조선관요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도자특별전’전시장을 정양모 문화재위원장과 최건 조선관요박물관장이 둘러보고 있다(위). 한국 백자의 자존심, ‘조선도자500년전’전시장.
최건 관장은 “아직은 가마터를 온전히 복원해 관리하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마터가 발견되면 흙을 돋아 묻어놓고 표시만 해두는 것이 가장 올바른 보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가마터의 중요성과 이 보존에 대한 무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2년 전 열린 제1회 도자기엑스포 때는 도자 역사의 ‘물증’을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끝에 광주시에선 100여곳 가마터 일대에서 도자기 조각 2천kg을 거둬들여 일부를 전시장에 놓았다가 거센 비난 끝에 다시 매립해버린 사건도 있었다.

분원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나무그늘 밑에는 사옹원 책임자들의 선정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죽 늘어서 있다. 사옹원 우두머리 장인인 도제조의 선정을 기리거나 번조관(불 때는 직책)을 칭찬하는 비석 들이다. 본래 이 비석들은 강가 ‘비석거리’에 서 있던 것을 팔당댐 건설을 계기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의 기록인 <분주원보등>을 보면 번조관을 비롯해 분원 경영의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27명이고 사기장은 108명, 나머지 417명가량은 잡역에 동원됐다고 한다.

분원은 철저한 분업으로 운영됐기 때문에 분원 사기장 가운데는 평생토록 불만 때다 죽는 이도 있었고, 일생 동안 물레만 돌리던 사람도 있었다. 조선시대 문인 이하곤은 1709년 백자 묘지(당시 고위층들은 일생의 기록을 자기로 구워 관에 넣었음)를 주문·제작하기 위해 분원에 와서 20여일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이때 보고들은 것을 문집 <두타초>에 적어놓았는데 “산모롱이에 사는 요인(窯人)들은 오랜 부역에 괴롭다. 지난해엔 영남까지 가서 진주 백토를 실어왔다”며 도공들의 노역을 동정했다. 또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돌아 잠깐 사이 1천여개 빚어낸다”고 기록해 당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엿보게 한다.

개발과 복원의 갈림길에서

사진/ 옛날 분원이 있던 자리에 1920년부터 들어선 경기도 광주 분원초등학교. 교정 한쪽에 줄지어 서 있는 사옹원 책임자들의 공덕비가 그 옛날을 말해준다.(알기쉬운 한국도자사)
분원초등학교가 자리잡은 언덕을 수십m 더 올라가니 일제시대 때 지어졌던 폐교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비엔날레에 맞춰 9월2일 ‘분원백자관’으로 거듭나는 폐교는 곧게 뻗은 전나무 사이로 교실 세칸 규모의 아담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년 전 이화여대박물관의 조사결과 이곳에선 대형 가마터 3곳과 시대별 백자 변천사를 추정할 수 있는 25개의 파편퇴적층이 발굴됐다. 이런 소중한 유적이 발견된 곳이기에 전시장 앞 운동장은 흙을 위에 덮고 잔디를 깔아 더 이상의 훼손을 막았다. 전시장도 신축하지 않고 기존 건물을 재활용했으며 외벽엔 강판을 덮어 시간이 흐를수록 멋스럽게 늙어가는 집을 만들었다. 막바지 공사를 독려하느라 현장에 와 있던 경기관광공사 최달룡 본부장은 “유적을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전시 효과를 거두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광주 일대 가마터는 보존 방안에 대한 연구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발굴하면 훼손은 순식간”이라며 조사는 하되 개발을 하지 말자는 쪽과 이를 복원해 사람들이 많이 느끼고 배우게 하자는 의견이 팽팽한 상황이다. 최소한의 개발을 원칙으로 한 ‘분원백자관’은 그 갈림길에 서 있는 시금석처럼 보였다.

광주=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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