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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무의 기억/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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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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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 시인
지리산에 들어온 지 6년째, 나는 되도록 책을 읽지 않으려 애를 썼다. 신문과 텔레비전도 마찬가지. 명색이 시인이란 자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자랑이겠는가. 하지만 그간 읽고 배운 것만을 가지고도 나의 삶이 어떻게 그것들을 소화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픽션은 더욱 그랬다.

존재 그 자체로 백과사전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만도 못한 소설과 시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자문하고 자문했다. 자위행위 수준의 수많은 책들 그 자체가 애꿎은 나무들만 죽이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산중의 겨울밤, 내 한몸 춥지 않으려고 땔나무를 구하고 그 나무로 군불을 지피다가도 문득 뒤통수를 치는 자괴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마저도 내 자신의 치열하지 못한 창작행위에 대한 반성이며, 오히려 산중에 사는 이들의 교만에 가까운 발언이다. 분명히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다만, 독서나 창작보다는 새롭게 세상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것이 걷는 것이었다. 강원도 황지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낙동강 천삼백리와 지리산 아랫도리 팔백오십리를 도보순례하고, 새만금 삼보일배 팔백리 길을 이 세상의 가장 느린 속도로 걸었다. 목적은 생명평화운동이었지만, 그 이전에 내 몸으로 일일이 국토를 둘러보며 내 생의 모든 지식과 욕망을 극도로 단순화시켜보는 것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이우만
오래 걷다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걷는 목적까지도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무아 무념의 경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그저 몸의 기억에 모든 생각을 한번 맡겨보는 것이었다. 인간의 걸음걸이는 빨라야 하루 40km를 갈 수 있으며, 바로 이 ‘백리 길’이 우리의 거리 개념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와 북상하는 꽃의 속도가 사람의 발걸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더불어 깨닫게 됐다.

10월 하순부터 남도를 향해 매일 걷는다면 날마다 단풍을 볼 수 있으며, 4월 초순에 민통선을 향해 매일 걸으면 또 내내 진달래꽃을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직접 해보지 않고는 또 제대로 모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듯이 책이나 교육을 통해 아는 것과 직접 몸 속에 저장되는 지혜는 확연히 다르다.

하물며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나무의 기억은 어떠할까. 그리고 수억만년 된 돌의 기억, 그 돌로 만든 천년고찰 삼층석탑의 기억 등등,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부끄럽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일단 오래된 나무를 나의 스승으로 삼았다. 아무래도 나무는 백과사전이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이미 백과사전인 나무의 침묵, 그 묵언의 소리를 한번이라도 들어보려는 나의 시도는 여전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예서 멈출 수도 없다.

틈이 날 때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남해군 창선면의 오백년 된 왕후박나무를 찾아가고, 송광사의 천년 된 쌍향수, 뱀사골 와운리의 천년송 등 이 땅 도처에 살아 있는 신목(神木)들을 한번 찾아가 보는 것이다. 그 나무들의 온몸에 입력되거나 활자화된 지수화풍의 시절들을 엿보며, 그 뿌리를 베개삼아 하룻밤이라도 잠을 자는 날이면 온몸에 수많은 나이테가 들어서는 느낌이다.

죽어서도 책이 되리

그러나 불행히도 아직 그 나무의 말씀을 하나도 들을 수 없다. 다만 그 나무의 눈으로 한순간이라도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풍경과 시간과 사건을 상상하며 나무처럼 말 없이 내 몸에 입력해보는 것이다.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며 배부른 노릇인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책을 읽거나 세미나를 하는 등 어설픈 교양적 욕구충족보다는 훨씬 더 육질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 유일한 책은 누가 뭐래도 나무다. 그것도 되도록 오래된 나무, 신목이다. 늦가을의 노란 은행나무 잎은 그대로 수천년간 누군가에게 배달된,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엽서요, 나뭇가지는 집배원의 손이며, 몸통은 그대로 우체국이다. 이 은행나무 우체국은 수많은 사연들을 나이테 사이사이에 숨겨두고 있다. 이제 그것을 읽어내는 깊은 눈이 필요하다. 나무는 이미 살아 있는 그 자체로도 책이지만, 죽어서도 책이 된다.

이원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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