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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녀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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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9-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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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여성이 미에 종속돼 살아가는 까닭… 뜯어보면 곱지 않은 데가 어디 있으랴

비텍스 선글라스를 마음속 깊이 갈망하는 소녀가 있었다. 그 엄마가 타이른다. “늘 그렇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게 뭔지, 혹시 광고 때문에 그런 생각이 주입된 건 아닌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내 보기에, 그 엄마는 신사임당만큼 현명하고 또 그만큼 진부한 여자처럼 보였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걸. 알고 봤더니 그 엄마는 여름 휴가 내내 바닷가에 나갈 때마다 똑같은 질문으로 가족들을 괴롭혀왔다. “내가 저 여자 엉덩이만큼 처졌어?” “내가 저 여자보다 못생겼어?” 남편은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통사정을 하고 아이들은 아예 귀를 틀어막는다.

영화 <파니 핑크>의 원작자이며 감독이기도 했던 독일의 여성 작가 도리스 되리의 소설집 <나 이뻐?>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그런 여자들이 있다.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수호자로 알려진 변호사가 아버지인 내 친구가 그렇다. 한번은 그녀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느닷없이 물었다. “야, 솔직히 말해봐. 상처받지 않을게. 내가 저 여자보다 못생겼어?”

나는 내 친구를 생각하며 <나 이뻐>의 책 껍데기 안쪽을 뒤적여 작가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 빈말으로라도 결코 미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순간 안도했다. 유머를 곁들여, 나를 포함한 보통 여자들의 적나라한 치부를 제멋대로 주무를 만큼 힘센 여자가 심지어 예쁘기까지 했다면 나는 오늘밤 잠은 다 잔 거였다. 휴~.


꽤 권위 있는 몇몇 문학상까지 수상한 일본의 인기 작가 히야시 마리코의 책 제목처럼 과연 예쁘지 않으면 사는 게 괴로운 걸까? 못생겼다는 이유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없고, 누구한테 맞은 적도 없고, 부당해고를 당한 적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보니 나도 꽤나 ‘여자의 미’에 종속되어 있는 편이었다. 내가 어떤 남자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날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내가 다른 어떤 날보다 예뻐보였던 날이었다. 여자는 남성이 아니라 자신의 여성성에 종속된다더니, 과연 맞은 말이다.

그런데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도리스 되리라는 잘난 여자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제 와서 새삼 소비사회의 허위의식이나 비극성을 고발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대신 나는 남자들에게 고하노니, 여자들을 더욱 예뻐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여자라는 못 말리는 동물들은 뜯어보면 대체로 다 예쁘다. 심지어 처음 봤을 땐 분명히 나보다 못생긴 것 같은 여자들도 두고 보면 나보다 예쁜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때로는 속상하다. 게다가 여자란 대게 더욱더, 그리고 오랫동안 예쁘고 싶어하는 가엾고 동시에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래서 옷도 사고 필사적으로 다이어트도 한다. 그러니 미의 획일화니, 몰개성화니 그런 말은 다 집어치우고 그냥 예쁘다고 말하면 될 것 같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리고 기왕이면 ‘아, 정말 예쁘구나’ 하고 원시적으로 감동했으면 좋겠다. 아니 쩔쩔매면 더욱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공개적으로 악담을 퍼붓고 싶은 남자가 있다. 다리가 예뻐서 미니스커트 입기를 좋아하는 내 후배 철이(별명인데, 아마 ‘은하철도 999’의 철이를 지칭하는 듯)의 뒷모습에 취해 따라왔다가 얼굴 보고는 대놓고 “못생겼네” 하고 가버린, 그 불한당 같은 아저씨! “당신 같은 남자한테는 세상의 그 어떤 여자도 과분하니, 그냥 평생 독신에 이어 독거 노인으로 홀로 늙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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