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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단백질 타고 생명체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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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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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발견 50주년에 인류의 뿌리를 찾는 여행… 유전자 이동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들도 다뤄

당신의 DNA는 타임머신이다?

과거를 알고 싶다면 역사책을 뒤적이면 될 일이다. 안 되면 갑골문이나 비석을 연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자가 발명된 것은 ‘기껏’ 1만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면, 당신의 DNA를 보라”고 미국의 인류학자 존 H. 릴리포드는 권한다. 역사책도 구전문학도 말해주지 못하는 사건들, 유적지나 유물도 남아 있지 않은 과거에 대한 정보는 우리 몸 속의 유전자에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인류학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인류’로서 공통적으로 보다 넓은 조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개체군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우리 모두를 껴안는 공통된 역사 또한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고대 인류의 DNA를 분석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릴리스포드가 쓴 <유전자 인류학>은 이 매혹적인 작업과정을 엿보고 그 결과를 함께 이해하는 즐거움을 준다. ‘유전자 분석’이라는 수사 도구를 들고 ‘과거’ ‘조상’ ‘뿌리’ ‘인류’를 찾아가는 탐정소설처럼. 이 책은 우리 유전자가 가진 특성들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쓴다.

유전자 분석으로 인류의 조상에 다가서


이 ‘유전자 역사학자’가 묻는 어려운 질문들을 한번 들어보자. 지은이는 동물 중에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친척’은 침팬지라고 한다. 우리 인간의 DNA 98% 이상이 아프리카 원숭이의 일종인 침팬지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인류의 조상은 언제부터 독립적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은이는 고대 인류 화석에서 뽑아낸 DNA를 현재 인류의 DNA와 비교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이 서로 다른 진화선을 밟기 시작한 것은 600만년 전이라고 주장한다. 또 현대 인류는 원숭이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지 몇백만년의 시간을 보낸 뒤인 13만~200만년 전쯤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네안데르탈인의 운명에 관한 의문은 고고학의 오랜 난제였다. 유골이나 유적 발굴을 한 결과 유럽과 중동아시아에 살았던 뇌가 큰 이 고대 인류는 현생 인류가 나타나기 5천년 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한 개인이나 작은 무리 차원이 아니라 종족 전체가 사라져버렸다는 점에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해왔다. 지은이는 네안데르탈인의 여러 유골에서 추출한 DNA 자료들을 통해 여전히 숱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그들의 발자취를 좇아간다. 현재 인류의 유전자와 그들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이 순식간에 펑 하고 사라진 게 아니라 수적으로 우월한 유전자 풀(pool)과 섞이면서 점차 희미한 존재로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DNA를 이용한 연구가 최근의 성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몇년 전 사람들을 매혹시킨 영화 <쥐라기공원>처럼 화석 속 수십만년 전 모기의 피에서 모기가 물었던 공룡의 DNA를 추출해 복제해낼 수는 없지만, 최근 과학자들이 고대인류의 DNA를 추출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카리 뮬리스(Kary Mullis)가 개발한 폴리메라아제 연쇄반응이라는 기술을 이용하면 소량의 DNA를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어, 고대 유골에서 추출한 극히 적은 DNA를 복제해 커다란 표본을 만들게 됐다. 1997년 뮌헨 대학의 마티어스 크링스팀은 네안데르탈인 화석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배열을 처음으로 추출해냈다

지은이는 매우 어려운 첨단과학의 연구 과정을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는 재주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DNA를 추출하고, 개체의 수를 측정하고 머리 둘레를 재고, 눈 색깔을 측정하고 표본을 분석하는 복잡한 과정에 간접적으로 동참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출신지를 추론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콜럼버스 등 유럽인이 아메리카를 찾아갔을 때 이미 그곳에 살고 있었던 아메리카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최초 아메리카인들이 약 1만5천년 전 아시아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이라는 게 정설. 이들은 아시아 어디에서 옮아간 것일까? 지은이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과 ‘Y염색체 단일유형 분석’이라는 복잡하고도 지난한 분석 과정을 통해 최초 아메리카인들의 출신지가 동북아시아, 곧 시베리아 남쪽 바이칼호 주변지역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는다.

고고학적 자료로 보면 유럽의 농경문화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농경문화는 유전자의 이동 없이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문화적으로 확산된 것일까? 아니면 농부 집단이 유럽으로 이주함으로써 농경문화가 전해진 것일까? 유럽인의 혈액형 분포 등을 보면 농부가 이주한 것이 맞다.

인종주의의 편견을 깨뜨리는 유전자학

오늘날 아프리카계와 유럽계의 혼혈인 미국인들의 유전자를 분석해보면 유럽계에서는 남성의 유전자 비율이, 아프리카 출신에서는 여성의 유전자 비율이 각각 높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유럽인 남성이 아프리카 출신의 미국인 여성 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또 문화적 동질성과 유대인간의 혼인을 중시하는 유대인의 유전자를 연구하면 유대인에 특히 부계쪽으로 많은 혼혈이 있었으며 유대인이라는 동질성은 유전자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대인은 문화적 동질성으로 결정된다.

이런 여러 이야기 끝에 지은이는 피부색깔을 기준으로 인종을 나누는 따위의 관습에 유전자학의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요컨대 인류의 생물학적 다양성에 대한 연구 성과들은 피부색이 피부색 이외의 다른 요인들, 그러니까 혈액형이나 DNA 표시자, 두개골 형태나 얼굴 생김새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중립적 요소란 사실을 밝혀냈다. “피부색을 통해 알 수 있는 개체군의 역사는 거의 없다. 단지 자연의 선택과 인간이 적응해온 역사를 얘기해줄 뿐이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나누고 개체군의 역사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이켜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인류학은 오늘날 인류를 반목과 전쟁과 파괴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문화간 혹은 인종간의 충돌이 전혀 근거 없는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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