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초창기 꼴찌의 대명사 삼미 슈퍼스타즈, 그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놓는 3인의 삼미주의 전도사
누구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이들은 만나자마자 김훈희씨가 준비해온 왕년의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하얀색은 82년 홈 유니폼이고, 하늘색은 85년 원정 유니폼이죠.” ‘짠물의 인천야구 역사’란 홈페이지(http://bruce2k.com.ne.kr/frame2.htm)를 운영하고 있는 김훈희씨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8월28일부터 시작하는 미추홀배 경기를 앞두고 공사가 한창인 어수선한 그라운드에 서서 사진 촬영을 했다. 전광판을 배경으로 유니폼을 입은 세 사람이 나란히 서자 소설 속에 묘사된 삼미 고별전이 떠오른다. 82년 인천을 연고지로 탄생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기별 최저 승률(82년 후기 5승 35패), 특정 팀 상대 연패(82년 삼미는 OB에 16번 모두 패했다), 국내 첫 노히트노런(84년 해태 방수원에게 당함), 팀 연속 18패(85년 전기) 등 믿을 수 없는 패전의 기록을 나날이 경신하다 85년 구단주인 삼미의 재정이 흔들거리는 바람에 청보 핀토스로 바뀐다. 85년 6월21일 삼미의 이름으로 치러진 마지막 경기에서도 삼미는 롯데 자이언츠를 물리치지 못했다. 텅 빈 응원석에선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공기층을 뚫고 ‘그날’의 한숨과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사진을 찍은 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동산고 야구부 사무실로 향했다.
마지막 팬클럽 업고 화려한 부활 꾀해
김훈희씨가 먼저 운을 뗀다. “삼미 첫 승리 투수가 인호봉 맞죠? 대구에서 삼성과 붙었을 때.” 김재현 코치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시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고 있었죠. 나는 19패. 지금 정민태가 22연승 바라본다고 하는데 22승은 몰라도 아마 내 기록은 웬만해선 아무도 못 깰걸요. 하하하.”
사무실에 들어서자 역시 “디테일에 강한” ‘짠물’ 김훈희씨가 비디오테이프를 꺼냈다. ‘삼미 슈퍼스타즈 하이라이트 모음집’. 85년 프로야구 개막식 전야제 광경이 TV화면에 흐른다. 당시만 해도 너무나 앳된 이선희가 수줍은 얼굴로 정구왕 선수(17번 외야수)와 인터뷰를 한다. 곧 이어 선수들이 무대에 좍 늘어서서 인천 시민들의 영원한 응원가 <연안부두>를 ‘원더 우먼’(슈퍼맨을 로고로 삼은 삼미 슈퍼스타즈는 선수 입장식 때 원더 우먼 복장의 피켓걸을 등장시켰다)과 함께 부른다. 이어 카메라는 자유공원으로 날아가 맥아더 동상 앞에 앉아 있는 가수 송대관을 붙잡고 삼미 슈퍼스타즈가 우승할 것 같냐고, 쉽고도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그 다음은 리틀 삼미 슈퍼스타즈 어린이 회원들과의 인터뷰. 한 꼬마가 참 씩씩하게도 외친다. “이번엔 우리가 꼭 우승할 거예요!!”
“85년에 우리가 18연패를 계속했죠. 나중엔 너무 속상하니까 김진영 감독이 선수들이 합숙하고 있는 호텔로 목사님을 불렀어요. 선수들 모두 무릎 꿇고 안수 기도를 받았죠.” 기도의 ‘효험’ 덕분인가. 그 뒤엔 1승을 거뒀다고 김재현 코치는 회상한다. “한두번 지면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라도 달라붙을 텐데 만날 지니까 지는게 버릇이 됐어요.” 어렸을 때 친척형과 함께 인천야구장에서 삼미 경기를 봤다던 김훈희씨도 거든다. “보통 홈팀이 지면 난리날 텐데, 삼미팬들은 경기가 끝나자 ‘오늘도 졌구나’ 하면서 별로 실망하는 눈치 없이 조용히 돌아서더라고요.”
하지만 삼미도 한때 ‘슈퍼’했던 시기가 있었다. 일본 리그에서 은퇴한 투수 장명부가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인 연봉 1억2천만원에 계약하고 입단하면서 돌풍이 인 것이다. 시범경기서부터 정구선, 김진우, 이영구의 3연속타자 홈런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그 전해 16전 전패를 당한 OB와의 게임에서 11 대 5로 대승을 거두며 OB 연패의 기록을 청산했다. 제2선발 투수 임호균의 선전과 팀 최초의 3할타자 양승관 등의 활약에 힘입어 삼미는 그해 전기에서 종합 2위, 후기리그에서 종합 3위의 성적을 거둔다. 기대 안 했던 홈팀이 이렇게 승승장구하자 그전엔 7만명 들던 인천 관객이 33만명까지 불어났다고 전한다.
“장명부는 ‘프로’였어요. 당시만 해도 다른 선수들은 정으로, 애향심으로 야구했어요. 어깨가 아파도 학교 선배인 감독이 ‘너 나가’ 하면 아무 말 없이 나가야 했어요. 투수가 한 게임 완투하면 그 다음 3일은 쉬어야 하는데 우리는 투수가 모자라니까 허구한 날 주구장창 던졌어요. 하지만 장명부는 달랐어요.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잘한 만큼 (돈으로) 받아야 한다는 데 철저했지요.”(김재현 코치)
장명부는 본래 구단주로부터 30승을 하면 1억원을 별도로 받기로 돼 있었다. 문서화되지 않은 약속이었지만 장명부는 30승을 따내기 위해 던지고 또 던졌다(한 시즌에 투구 이닝이 427.1/3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30승이 정말 이뤄지자 구단주는 난색을 표한다. 1억원이 별도로 책정된 예산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단 운영비에서 갹출해야 했다. 구단에 대한 실망과 건강 문제로 장명부는 ‘태업’을 일삼았고, 그 다음해 84년 시즌에서 형편없는 기록을 낸다.
박민규씨는 이를 ‘프로’와 ‘아마추어’와의 긴장으로 설명한다. “아마도 장명부와 구단 사이에 ‘프로’의 진도가 달라서 그랬을 거예요. 장명부는 일본 프로야구계가 어떤 건지 이미 알고 있었고 거기에 맞춰 판단했던 거죠.”
장명부의 수난… 프로세계의 ‘아마추어들’
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에 포항제철과 한국화장품에서 아마추어 야구선수로 뛰었던 김재현 코치는 아마와 프로의 차이가 매우 컸다고 말한다. “아마추어는 선수를 그만두더라도 소속 회사에서 계속 남아 일하는 직원이지만, 프로에선 못하면 자유계약선수로 방출되죠. 잘하면 많은 돈을 거머쥐지만 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어요.”
프로는 아름답다고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잔인한 법. 김재현 코치는 청보가 태평양 돌핀스로 이름이 바뀌던 88년 프로야구계를 떠난다. 완전히 야구를 접고 사업가로 변신했던 그는 98년 외환위기 때 부도를 맞으면서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다. 박민규씨도 ‘프로세계’에서 패배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학교 다닐 때 항상 꼴찌였어요. 회사에서 일할 때도 나는 하느라고 열심히 하는데 늘 남보다 뒤처졌어요. 내가 잘하면, 남들은 나보다 더 잘하니까. IMF 때 퇴사하면서 나 같은 패배자를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패배’ 하면 ‘삼미’잖아요. 자료를 조사해보니까 프로야구야말로 우리 사회에 ‘프로주의’를 각인시킨 장치더라고요. 프로야구 바람이 휩쓸면서 너도나도 프로가 돼야 하는 고도 경쟁사회가 된 거죠.”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삼미의 패배를 보며 우리 사회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인식의 단초를 얻는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치열하고도 외로운 광팬이었던 주인공은 고별전을 보고 와서 밤새 잠을 설친 끝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삼미의 야구 역시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구였다는 사실이다. 분명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치고, 삼진도 잡을 만큼 잡았던 야구였다. 즉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다는 쪽이 확실히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 그토록 평범한 야구를 했다면 6개의 팀 중에서 3, 4위 곧 중간을 해야 했는데 왜 꼴찌를 했을까. 답은 ‘프로’였다. “평범한 야구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프로야구라는-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평범하면 꼴찌를 만드는 프로의 세계는 꼴찌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구조이기도 했다. “아마야구 시절 얘기를 들어보면 사람들은 우승팀이 누구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죠. 하지만 프로야구에 와선 우승팀말고도 꼴찌팀이 누군지 다 기억하고 순위와 기록에 매달리게 되죠.” 박민규씨는 이렇게 보통 사람들을 꼴찌로 손가락질하는 비정상적 사회에선 오히려 삼미의 꼴찌 정신이 미덕이라고 말했다. 물론 곧바로 김재현 코치가 “그런 걸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는 정말 야구 못했을 거다”라고 토를 달았지만.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건만…
마침 이날은 동산고 동문회에서 야구부 선수들에게 고기를 먹이는 걸로 선약이 잡혀 있어 아쉽게도 세 사람은 2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을 끝내야 했다. 문 밖까지 따라나와 배웅하던 김재현 코치가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없어져버릴 수 있는 삼미의 기억을 이렇게 남게 해줘서 고맙다, 정말 고맙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삼미 슈퍼스타즈!
강원도에서 딸부잣집 둘째로 태어나 야구와 전혀 상관없는 유년시절을 보낸 내게 삼미 슈퍼스타즈는 OB 베어즈나 MBC 청룡과 비교할 때 두 음절 더 발음해야 하는 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초·중반 바야흐로 온 나라에 프로야구 광풍이 불어닥치던 시절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라면 ‘삼미 슈퍼스타즈’를 입 밖에 꺼내기 전, 그 앞에 감탄사를 붙이곤 했다. 아~ 삼미 슈퍼스타즈….
도대체 삼미 슈퍼스타즈가 뭐기에, 사람들은 가슴 싸한 아련한 추억으로 빠져드는 표정을 짓는가. 인천에서 20여년째 살고 있는 한 지인은 아예 ‘삼미 슬퍼스타즈’라고 했다. 지고 지고 또 져서 너무 슬펐기 때문에.
제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박민규씨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신문사 펴냄) 출간을 맞아 ‘삼미 슬퍼스타즈’를 추억 밖으로 끄집어내기로 했다. 8월21일 오후 4시 지금은 종합경기장으로 이름이 바뀐 옛 인천야구장 정문 앞에서 ‘삼미’ 삼인방의 접선이 이뤄졌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원년 멤버였던 투수 김재현(인천 동산고 야구부 코치), 영종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30여년째 인천 토박이로 살며 인천 야구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짠물’ 김훈희, 그리고 ‘삼미주의’를 활자화해 전국 각지로 전파하고 있는 작가 박민규. 편집자 |

사진/ 삼미 슈퍼스타즈 유니폼을 입은 토종 인천야구 팬 김훈희씨, 원년 투수 김재현씨, 소설가 박민규씨(왼쪽부터).

사진/ 에 실린 삼미를 응원하는 원더 우먼 복장의 치어리더와 삼미 선수들의 경기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