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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머리를 들볶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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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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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자연 상태에 가까운 머리 모양이 멋스러워… 30년 전의 오노 요코에 반하다

며칠 전 공짜표가 생겨서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구경했다. 사실 내 돈 주고는 안 갈 요량이었는데, 그 이유가 무척 터무니없다. 이번 전시를 앞두고 방한할 당시의 오노 요코 머리 모양이 무척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노 요코의 갈색 컬러 브릿지를 넣은 그 짧은 커트 머리는 자기 나이보다 훨씬 더 젊어보이긴 했지만 전혀 아티스트답지 않았다. 뭐랄까, 그 머리 모양은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아티스트를 구슬리고 족쳐대는 갤러리 관장이나 큐레이터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 머리 모양을 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머리카락 몇 뭉치에 호일을 말고 앉아 있는 오노 요코를 상상하면…. 오, 생각만으로도 홀딱 깬다.

하지만 전시회에서 그 유명한, 존 레논과의 침대 시위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보자 오노 요코에 대한 환상이 다시 내 마음 속에서 부활했다. 오노 요코의 그 원시적인 머리는 침대 위에서보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더 멋졌다. 존 레논과 함께 나란히 걸으며 평화와 반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그들의 머리통 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오노 요코의 얼굴이 긴 생머리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보통 여자라면 한번쯤 머리카락을 귀 뒤로 꼽았을 텐데 오노 요코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완전히 가려진 사태에 대해서 어떠한 수습도 취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람 속을 걸으며 이야기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목도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바로 그 장면이었다. 정말 일대장관이었다.

나는 2년 전부터 예술가도 아닌 주제에 이런저런 이유로 미용실에 가지 않고 있다.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거울 앞에 앉아 있으면 으레 가져다주는 여성지가 지겹기도 하거니와, 헤어 디자이너들이 전체 비율과 조화를 고려해서 완벽하게 다듬어주는 머리 모양이 적어도 나의 본성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스스로 머리를 자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앞 머리만 잘랐다. 부엌에서 쓰는 가위로 가지런하게 일자로 잘랐다. 일명 뱅 스타일. 내 옆머리나 뒷머리는 레어어드층이 많은 생머리였는데, 당시엔 그런 전체 모양에 뱅 스타일의 앞머리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회사에 갔더니 난리가 났다. 머리를 자르니까 벨기에의 디자이너 베로니크 브랑퀸호 같다는 것이다. 지난 30여년간 줄곧 미용실을 드나들었지만 그런 수확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이후 나는 회사 책상에 앉아서도 거울 속의 제 얼굴을 째려보며 가위를 드는 다소 공포스러운 진풍경을 종종 자아내고는 했는데, 처음에는 무섭다던 회사 동료들이 지금은 너도나도 가위를 들고 설쳐대고 있다. 특히 올 여름엔 전체 머리가 어떤 모양이든 간에 앞머리를 일자로 자르는 뱅 스타일이 유행인데, 이 트렌드의 선두두자는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전도연 이전에 나라는 여자가 아닌가 하며 내심 흡족해하고 있다.

또다시 이야기가 잘난 척하는 분위기로 흘렀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되도록 덜 연출한 자연 상태의 머리 모양이 좋다는 것이다. 흰머리가 성성한 피나 바우슈의 생기 없는 긴 머리카락은 그 자체가 일상적 예술이다. 반면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센’ 3대 신문이 열심히 밀어줬음에도 이회창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한 그 불가사의한 사태는 그가 염색을 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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