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미국의 물리학자 머레이 겔만은 ‘쿼크’란 말을 창안하고 그 존재를 예언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에 힘입어 4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한창 시절 그는 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칼텍에서 연구했는데, 당시 이들은 칼텍은 물론 미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천재로 꼽혔다. 그런데 두 사람 중 겔만은 경력면에서 훨씬 독특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천재로 인정받아 14살 때 프린스턴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남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인 18살에 대학을 졸업한 뒤 21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소립자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노벨상에 이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겔만의 생애에는 평생 그를 뒤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소년 시절’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그는 어린아이들의 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일해에 걸렸지만 남들이 놀릴까봐 특수한 열대병의 일종이라고 둘러댔다. 나중에 장년이 되어서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어떤 신동에 관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영화관에 같이 갔던 사람은 겔만의 이런 모습을 보고 소년기의 공백이 그에게 남긴 상처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프루스트가 말한 ‘잃어버린 시간’을 그때야 찾은 것일까? 실제로 그는 언젠가 천재 아들을 둔 한 어머니의 상담에 응하면서 절대로 월반시키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생물학에는 이른바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유명한 명제가 있다. 동물의 수정란이 세포분열을 통해 하나의 개체로 완성돼가는 과정에서, 그에 앞서 거쳐간 수많은 선조들의 진화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성체에서는 다르게 보이는 동물들도 초기 발생 단계에서는 매우 비슷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모든 동물은 아득히 먼 옛날 하나의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서로 달리 진화되어 나왔다는 주장을 편다. 수정란이 이처럼 계통발생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배아의 생활환경이 원시생물의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짧은 태아기에 엄청난 진화 과정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따라서 현재의 개체발생은 오랜 세월의 진화 과정에서 추출된 ‘필수적 단계’들로 구성돼 있다고 여겨진다.
요즘 우리나라는 정권이 교체된 뒤의 초기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파업들이 이어지고, 국내외 정책들이 일관성 없이 흔들리며, 여러 가지 비리 사건이 꼬리를 문다. 물론 이런 현상을 민주사회에 걸맞은 다원적 양상의 표출이라고 좋게 보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필수 요소’라고 할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짧은 시간에 완성한 우리나라의 개체발생에는 아직도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를 메우지 않는 한 아무리 힘 좋은 성장 엔진이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다. 파인만은 겔만과 동등한 천재로 인정받았지만 소년 시절은 정상적으로 보냈다. 그래서일까, 한점 흐림 없는 그의 낙천적 기질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현재 눈앞에 당면한 혼란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먼 뒷날을 생각한다면 이를 계기로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