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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당한 폭력의 신화를 깨자/ 양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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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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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 하는 예컨대 | 정당한 폭력은 존재하나]

양희창/ 서울 한가람고 2학년

정당한 폭력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는 유년 시절부터 정당한 폭력이란 질서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걸 배워왔다. 정당한 폭력은 선이 악을 응징할 때, 해악을 끼치는 자를 응징할 때, 말로 해서 안될 때 효과적인 방법으로, 상대방이 폭력을 사용할 때의 대응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어찌보면 정당한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이란 자신밖에 모르고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질서 유지를 위해 정당한 폭력이 행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정당한 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강해 보이고, 정의의 수행자처럼 보인다. 결국 그것을 문제 삼고,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한국사회의 공준처럼 이는 증명하거나 의심의 여지 없이 당연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정당한 폭력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살아오지 않았다. 단지 아이가 어른으로 배워가는 과정, 악인에게 행해지는 처벌처럼 인간사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 정도로 생각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정당한 폭력의 실체에 대해 캐묻고 들어가면 그것이 기득권층의 지배논리이며, 정치적·종교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먼저 정당한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우리가 정당한 폭력에 중독된 것은 아닌지, 혹은 그것이 있다고 믿는 환상에 빠진 것은 아닌지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정당한 폭력의 신화를 굳게 믿고 자라왔다. ‘말로 안 되면 때려서라도’ ‘미운 자식 떡 하나 주고 이쁜 자식 매 하나 준다’. 어릴 적부터 여러 가지 명분으로 우리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이처럼 정당한 폭력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다. 우리는 그것의 중독자이기도 하며, 그것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이처럼 정당한 폭력이 존재하고 그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학습되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자, 인문학자, 사회과학자 등 수많은 지식인들이 메달려왔기 때문이다.

정당한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학습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매체 속에서도 정당한 폭력은 미화되고, 절대 정의인 양 찬양된다. 우리는 어린 시절 재미있게 본 <슈퍼맨> <독수리 5형제> 같은 영웅들이 사용하는 수단이 정당한 폭력이며, 이것이 현실세계에도 통용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비단 어린이들이 보는 만화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어른들이 즐겨 보는 영화, 소설에도 나타난다.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도 정당한 폭력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의를 위해서 휘두르는 주인공 네오의 폭력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도 정당하다는 명목하에 그들의 죽음은 희석되고 묵살된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걸쳐 행해지는 교육을 받은 우리는 계속해서 정당한 폭력의 신화를 재생산하고 다시 수용한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그 가해자가 된다. 이처럼 지속적인 정당한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들은 폭력에 길들여지고 무감각해진다.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대한민국은 이런 식의 폭력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상관의 구타, 윗사람의 폭력을 있게 한 것은 이 사회에 만연한 정당한 폭력의 신화 때문일 것이다.

넓은 시각으로 보면 정당한 폭력의 논리는 전 인류에 만연해 있는 문제다. 지식인들이 늘 예로 드는 유럽의 역사가 아니라도 여느 나라의 역사를 보았을 때, 이러한 정당한 폭력의 논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비극을 안겨주었는지 알 수 있다. 십자군, 태평양전쟁,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자신들만의 잣대가 정당한 폭력으로 포장돼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장기적인 역사의 안목을 가지고 보았을 때 정당한 폭력은 교묘한 정치논리가 담긴 사탕발림이며,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로는 필요악처럼, 어떤 곳에서는 필수 요소처럼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당한 폭력은 인류사회를 지배해오던 기득권의 지배논리였다. 그것은 사회 소수자와 약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정당한 폭력이란 없다. 오직 정당한 폭력 뒤에 있는 지배집단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지난 몇천년간 그 허구의 신화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그 틀을 깨야 할 필요가 있다. 그 틀을 깨기 위해서는 단순히 몇 가지 법 제정과 수정으로만 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그것이 부조리하고 허구의 개념임을 일깨우고 많은 이에게 알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짧은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계층차별, 학벌차별처럼 정당한 폭력은 전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고 자유 인간을 억압하는 허구의 개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더 발전된 방향으로 비약하기 위해서 그것을 해체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의 성·인종 차별 논리가 점차 사라져가듯이 정당한 폭력의 신화는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사라져야만 한다. 그리고 인류사에서 정당한 폭력이 최선 혹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게끔 해야 한다.

양희창/ 서울 한가람고 2학년

[칭찬과 아쉬움]

‘정당한 폭력은 존재하는가’를 주제로 한 논술 글쓰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폭력의 입장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그 중 정당한 폭력의 신화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담은 한가람고 양희창 학생의 글이 단연 돋보였다. 이 밖에 정당한 폭력의 남용을 지적한 원주여고 3학년 이정혜 학생의 글도 차분한 문체로 논리를 전개해 눈길을 끌었다.

양군은 사회 구성원이 정당한 폭력의 ‘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문화풍토, 교육과정, 군사주의 등 일상의 경험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특히 정당한 폭력에 길들여진 우리 모두가 결국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다는 지적은 사건·사물의 양면성을 볼 줄 아는 빛나는 통찰이다.

양군은 또 십자군 전쟁, 이라크 침공 등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쟁 경험을 통해 정당한 폭력의 허구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다만, 기독교도의 ‘정의’가 사실은 이교도에 대한 ‘편견’이었음을 통해 정의의 상대성을 좀더 명확히 지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세계사뿐 아니라 피로 물든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국가가 ‘폭력 권하는 사회’를 조장해온 사실을 지적하는 부분도 빠져 있다. 이에 비해 만화영화, 메트릭스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 폭력의 일상화 부분은 너무 길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오히려 제도화된 폭력인 ‘차별’이 어떻게 소수자들을 억압해왔는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면, 글의 설득력이 커졌을 것이다.

양군의 글은 내용의 충실함에 비해 형식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우선 주제글에서 제시한 ‘스포츠’에서 정당방위 문제와 연결고리가 없다. 이 문제를 글의 서두에 짧게라도 언급했다면 글의 구성이 더욱 탄탄해졌을 것이다. 정당한 폭력의 논리적 핵심인 정당방위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도 아쉽다. 또 구성으로 보면 본론이 너무 길어져, 결론 부분이 빈약해졌다. 폭력의 신화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선언만 있을 뿐, 이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너무 길어 글의 논점을 전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점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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