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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키나와, 그 통증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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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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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속살을 30여년 동안 카메라에 담아온 이시가와 마오가 말하는 오키나와의 과거와 오늘

놀랍게도 그는 활기찼다. 3년 전 신장암 선고를 받은 데 이어 직장암 수술까지 받았다던데. 지난해 출간된 사진집 <오키나와 소울> 첫 페이지에 실린, 배꼽 옆에 인공항문을 단 모습으로 사진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펼쳐보지 않았더라면 그가 얼마나 힘들게 병과 싸우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그는 씩씩한 사람이었다.

사진/ 이시가와 마오는 오키나와를 통해 국가주의의 허구성을 들춰낸다.(류우종 기자)
‘한국 일본 오키나와에 관한 기록과 기억, 사진가 10인의 눈’(8월22일까지, 서울 서초동 한전프라자갤러리)을 위해 한국에 온 이시가와 마오(50)를 만났다. 이시가와 마오는 오키나와에서 태어나 오키나와를 주제로 30여년 동안 사진을 찍어왔다. 그러나 그는 찍고자 하는 대상에 렌즈를 들이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오키나와의 풍경과 현상 그 자체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오키나와에 대한 작업은 그대로 자신의 삶이 되었다.

변방의 섬을 점령한 미군들의 세계


이시가와가 아직 18살의 소녀였던 1972년, 오키나와에선 시위가 일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미군이 점령해온 일본 아닌 일본, 오키나와에서 조국복귀운동이 일어났다. 전염병처럼 오키나와를 물들이던 그 열기 속에서 그는 시위를 제압하던 기동대원이 화염병에 맞아 죽어가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다. “같은 오키나와인끼리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게 됐을까.” 이시가와는 이 사건이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오키나와의 내면을 이해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손에는, 마침 사진기가 들려 있었다. 학교 사진 동아리에 들어 있던 이시가와는 주저 없이 사진을 삶과 작업의 도구로 택했다.

그가 처음으로 사진가의 길을 내디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방학을 보내러 고향에 온 이시가와는 오키나와 주재 교도통신 기자를 만나 그에게서 파인애플 통조림 공장의 한국인 노동자 착취 실태를 고발하는 취재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는다. 한달 동안의 위장취업 기간 동안 비록 비리의 물증은 잡아내지 못했지만 이때의 경험은 강렬했다. 오키나와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사진을 찍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후 그가 처음에 택한 주제는 오키나와의 미군이었다. “점령군이자 이방인인 미군을 가장 근거리에서 찍는 방법은 무엇일까, 머리를 굴리다 미군과 가장 가까운 오키나와의 민간인은 클럽의 호스티스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에 대한 열정이 그 모든 것을 대신했던 22살의 겁 없는 이시가와는 흑인들을 상대하는 클럽에서 일했다. 그는 이때 인생과 사진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당시는 미국 안에서도 흑인 민권운동이 막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미군 내에서도 흑인-백인 갈등이 심했다. 자신의 조국에서 소외받는 흑인들과 일본 본토에서 푸대접받는 오키나와인 사이엔 공감이 쉽게 이뤄졌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게 됐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질시의 대상인 동료 호스티스들도 그에겐 ‘스승’이었다. “오키나와에서도 흑인 미군과 사귄다고 하면 편견이 심했다. 하지만 당시 내가 만났던 동료 호스티스들은 이런 시선에 거리낌이 없었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거’라는 주관이 뚜렷했다.” 그는 이때 개인 사진을 그토록 밀착 취재해서 찍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의미 있는 작업인지 깊이 느꼈다고 했다.

내멋에 겨워 사는 사람들을 찾아서…

사진/ <일장기>프로젝트는 ‘하나의 국가’ 일본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표현한다.
3년간의 클럽 생활을 마감한 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오키나와 시바이’라는 오키나와 토속어로 공연하는 전통 유랑극단이었다. 13년 동안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들의 일상사를 세밀히 취재했다. “오키나와어를 쓰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날로 관객도 적어지고 생계도 어려워졌지만 극단 식구들은 천하 태평이었다. 이들 역시 ‘내가 좋아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오키나와 시바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전후 험난한 세월을 거친 시골 할머니들이었다. “전쟁으로 오키나와 사람의 4분의 1이 죽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고단하게 살아왔다. 이들에게 전통극은 거의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그는 배우들의 대사 하나 몸짓 하나에 울고 웃는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에서 더께가 앉은 고통을 봤다.

클럽 호스티스, 유랑극단 배우들을 포함해 이시가와가 줄곧 흥미를 느껴온 것은 ‘내 멋에 겨워’ 사는 사람들이었다. 서른살 넘어 그가 차린 선술집에 드나들던 부두 노동자들도 그런 부류였다. “그들은 오키나와어밖에 모르고 일하지 않을 때는 자기네끼리 술 마시는 게 전부였다. 늘 ‘주변’에서 살고 있지만 불만이 별로 없었다. 멋부리고 있는 척하기에 바쁜 세상에서 그처럼 자신의 스타일대로 사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그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노동자와 그 친구들만의 ‘흥겨운 자폐 세계’를 속도감 있게 담았다.

80년대 후반부터 그는 ‘일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87년 우리나라로 치면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국체 소프트볼 대회장에서 한 오키나와인이 일장기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신성한 국가의 상징에 흠집을 내는 이 발칙한 사건에 일본이 들끓었다. 이를 계기로 이시가와는 일장기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담는 작업에 매달린다. 평범한 일본 시민을 포함해 홋카이도의 아이누, 재일 조선인, 우익 등 100명에게 일장기를 이용해 자기 맘대로 표현해보라고 한 뒤 그 모습을 찍은 것이다. 굽든 찌든 삶든 어차피 일장기는 먹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며 젓가락으로 일장기를 먹는 시늉을 한 인권운동가, 히노마루가 내 목을 죄고 있어 답답하다며 일장기의 붉은 태양을 가르고 그 사이로 얼굴을 불쑥 내민 조선인 등 국가 상징기의 근엄함을 깨고자 하는 작은 반란의 장면들이 실렸다.

“오키나와인의 눈으로 파주를 보련다”

사진/ 오키나와 시바이의 배우와 부두 노동자들. 이사가와는 이들이야말로 ‘내멋대로’사는 진정한 오키나와인이라고 믿는다.
이시가와는 일장기가 내포하는 일본의 전체주의적 근성을 혐오한다. 개인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국민들에게 복종을 주입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아시아의 이웃국가를 침략하는 것과 한 고리로 묶여져 있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도, 본토도 아니었던 오키나와는 방치되고 무시됐다. “미군 주둔으로 경제적 이득을 본 사람들도 많다. 무작정 미군 철수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58년 동안이나 미군 시설의 75%가 오키나와에만 집중돼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미군이 정말 일본을 지켜줄 수 있다면 천황과 국회가 있는 도쿄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그는 전시회 개막식을 마치고 경기도 파주로 달려갈 것이다. 미군과 긴장관계에 있는 한국의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그는 미군으로부터 시민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던 1972년 이전의 오키나와와 요즘 한국이 비슷하다고 본다. “단순한 현실 고발이나 비난이 아닌, 미군 주둔으로 말미암은 현상들을 오키나와인의 눈으로 투명하게 보고 싶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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